‘20.8.23(일) 남해관음포 이순신 순국공원 오늘은 8월4째 일요일이다. 정기 산행일인데 이제는 모두 70대 후반이다 보니 산에는 가지 못하고 명승지나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 하루 일과를 보낸다. 오늘은 오봉회 회원8명중 정인숙만 불참하고 7명이 차량 두 대로 분승하여 한 달 전에 갔던 갈화왕새우구이로 유명한 고현면 탑동에 있는 여진수산식당(010-8572-3503)으로 두 번째 찾아갔다. 지난해 새로 건설한 노량~남해대교를 지나 7월달에 갔던 여진수산식당에 도착하였다. 출발시간이 이르다 보니 아직 식당이 문을 열지 않아 조금 전에 지나온 이순신 순국공원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아주 옛적에 함안군 중등학교교장 연수차 이곳을 들린 적이 있었고 그 외도 여러 번 이곳을 찾았다. 날씨가 덥다보니 움직이기에는 불편하나 사적지는 가도 다시 가고 싶은 곳이라 혼자서 관음포가 있는 낮은 산에 입구에는 이순신 순국공원으로 변경하여 많은 변화가 있다, 먼저 계단을 오르면 戰方急 愼勿言 我死(전방급 신물언 아사)글을 새긴 높은 석탑이 서있다. 1998년 12원 16일 이충무공40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유상남 해군참모총장이 쓴 유언비,『지금 전쟁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의 한자가 음각되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대성운해(大星隕海):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편액이 적힌 비각이 있다. 관음포 해안에 위치한 이곳은 이순신 장군의 영구가 처음 육지에 안치되었던 곳이다. 공이 순국하신지 234년 후인1832년(순조 32)에 공의 8세손 이항권이 왕명에 의해 단을 모아 제사하고 비와 비각을 세워 이락사라 칭하였다. 대성운해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 라는 편액이 붙은 이충무공 비각 안에는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가 비문을 짓고 형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이익회가 쓴 유허비가 있다. 이곳을 사적 232호라 한다. 이곳에서 약500m 더 가면 관음포가 내려다보이는 첨망대(瞻望臺)가 있다. 오늘은 그곳 까지는 가지 않고 다시 돌아 나와 최근에 조성한 이순신순국공원으로 갔다. 그곳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그때도 느꼈지만 관음포 앞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판옥선 지휘소에서 수군을 진두지휘하는 이순신장군을 형상화한 상징조형물이다. 바닥에 새겨진 글을 보면 이순신장군이 부하들에게 강조하신 글이 있다. 必死則生. 必生則死(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살 것이요, 살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凡軍臨敵 不用命者處斬(무릇 군은 적군을 상대하여 명령대로 하지 않는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 글이 땅바닥 블록위에 쓰여 있는데 이는 관람객이 쉽게 볼 수 없어 아쉽기도 했다. 기둥을 세우거나 벽에 새겨 관람객이 지날 때 마다 한 번 더 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남해군청 문화관광과에 건의를 하기도 한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다시 여진수산식당으로 가서 왕새우 특미를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남해읍 이동면 과 삼동면, 지족면 창선대교를 거쳐 사천~ 창선대교를 지나면서 위로는 각산에서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보면서 우리나라 명승지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임을 새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잠시 쉬었다가 가기위해 모충공원(模忠公園)으로 이동하였다. 여기는 충무공 이순신의 넋이 서린 모충공원이다. 여수의 전라좌수영에서 군사훈련에 여념이 없던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이 조선반도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사천 선창에서 왜군을 맞아 적선 13척을 쳐부수어 사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1592년 5월29일(양력7월8일) 의 일이였다. 사천해전은 이순신의 두 번째 출전으로 네 번째 전투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리 기위해 해방후 박종실씨 등 많은 인사들이 여기에 추모의 기념비를 (1952년.3.18) 세웠다. 오봉회 회원들은 이곳 정자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집으로 일찍 귀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