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축제

‘22.10.13. 아침 7시에 진주10월 축제 현장으로

雲山- 2022. 10. 13. 17:17

‘22.10.13. 아침 7시에 진주10월 축제 현장으로

20221010~113일 까지 2022년 진주 남강 유등축제, 71회 개천예술제, 2022코리어드라마 페스티벌 행사가 진주성 및 남강 일원에서 개최중이다.

나는 아침 7시에 자전거를 타고 진양교를 건너 예술회관 쪽으로 가면서 칠암동 둔치에서부터 살펴보았다.

형평운동 조각상, 모녀상, 비상(飛翔)조각상이 아침 햇살에 빛나 진주 상징인 형평운동 발상지로 많은 관람객이 볼 수 있는 있는 위치에 촉석루 문 앞쪽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이동하여 잘 건립해 두었다.

먹을거리 식당들은 아직 비워있어 전국에 홍보가 되지 않았는지? 연례에 비해 조용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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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남강아래 망경동 둔치와 남강에 펼쳐진 각양각색의 유등들이 수 없이 떠있고 하늘 높이 많은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다.

그리고 진주시민들이 동참한 유등 터널에는 수 많은 등이 걸려 있어 특색 있게 보인다.

강위에 설치한 부교도 올해는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져 이동하기에 쉽도록 해 두었다.

남강에는 진주의 상징 하모를 비롯하여 많은 유등이 설치되어 밤이 되면 황홀하게 불빛에 찬란하다.

역사의 강 평화를 담다』 『JINJU NAMGANG YUDEUNG FESTIVALDL, 진주 월경사 청룡,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반출된 국보급 연지사종등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다시 천수교를 지나 공북문 앞에서 자전거를 세워두고 성벽을 바라보니 진주성 수축 관련 명문이 쓰여 있다. 1680년 진주성을 개축 할 때 축성 작업의 일부를 담당한 사람을 표시한 것으로 강희19년 산음(산청), 마병중초 사천곤양 하동 단성, 함양 등 여섯 개 관활 구역 군사들이 한 개의 초를 이루어 쌓았다 라 새겨져 있다

공북문을 통과하여 촉석루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사진을 많이 남겼다.

촉석루 대문은 닿쳐 있고 촉석루 정원에 심어둔 무과나무에 노란모과가 너무 많이 달려 가을을 상징 한다.

담벼락에는 옛 진주 촉석루의 사진을 전시 했는데 1910년 촉석루와 의기사, 1915년 진주성과 남강 배다리, 1920년대. 1927년대, 1930년대, 1937년대 진주성과 남강교, 1960년대, 옛 사진을 보니 진주의 역사를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의병 제 말 과 그의 조카 제홍록 공적을 함께 새긴 쌍충사적비 비각을 둘러보았다.

 

 

다시 진주 박물관 쪽으로 이동하니 박물관 앞 공연장에는 임진왜란 전투 시 진주성에서 조선 민관군 과 일본군과의 전투 현장을 유등으로 재현해 두었다.

 

 

 

다시 청계서원(淸溪書院)으로 들어갔다. 문을 활짝 열어 두어 쉽게 답사 할 수 있었다.

청계서원은 고려 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신열 선생과 고려공민왕 13년 봄 이 땅에 목면 씨앗을 처음 심어 그중 오직 한 알을 살려 크게 번연시키고 씨아와 물레 그리고 베틀을 창제 하여 온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 베옷을 입힌 문충공 정천익(鄭天益)선생을 모신 곳이다.

비석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유방백세(流芳百世:위대한 업적이 후세에 길이 전하라)

라고 쓰여 있다.

서원에서 조금 내려오면 진주성도 와 운주헌 터(조선시대 통제사 와 병사의 집무실 명칭) 표시판이 있다.

 

그 옆에는고려 충신 하공진 공 사적지 경절사(擎節祠)가 있다.

이곳에도 문을 여러 두어 쉽게 답사 할 수 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충의당(忠義()). 수덕재(修德齋)가 있다.

그리고 표석에 아시고려인. 불감유이심(我是高麗人. 不敢有二心)나는 고려인이다 감히 두마음을 갖지 않는다.

고려 현종2(서기1011) 거란의 40만 대군이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전 국토가 초토화 되었을 때에 현종은 남으로 급히 몽진(蒙塵)길을 떠나면서 하공진(河拱辰)을 인견(引見)하고 화친교섭의 대임을 명하였다.

국가존망의 대임을 맡았던 공은 곧 적중(敵中)으로 가서 거란왕 을 만나 능변(能辯) 의 외교로 거란 40만 대군을 철군케 하고 자신은 적의 볼모가 되어 연경으로 잡혀가 아시고려인 불경유이심(我是高麗人. 不敢有二心) 라는 최후의 일언을 남기고 죽임을 당하였다.

영정은 기린각 안에 모시고 있다. 나는 묵례를 하고 경절사(擎節祠)를 나왔다.

 

나오면 바로 포정사다 포정사 뒤에는 신랑신부 시집장가 가는 옛 풍속을 잘 표현해두었다.

신랑은 말을 타고 신부는 가마를 타고 가는 모습의 유등이다.

포정사 앞에는 守令以下 皆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1604년 이래로 경상도 우병영, 1895년에는 진주관찰부, 1896년에는 경상남도관찰부가 있었던 곳으로 우병영의 정문인 망미루, 관찰부의 정문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에 세워진 것이다.

병사 및 관찰사 이외의 모든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충무공 김시민장군 상(忠武公 金時敏將軍 像) 앞에 갔다.

이동상은 200011일에 세웠다.

진주성은 1592년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대첩이 있었고 15932차 전투 때 성이 함락되어 논개가 왜장을 안고 순국한 현장이다. 이곳 진주성은 1896년에 도청소재지가 있었고 1925년 도청은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1963년 사적 118호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복원사업이 있기 전 까지 민가 750호 여동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2000년 에 진주성 정화 사업이 완료 되었다.

 

김시민장군 전공비

기예이강(氣銳而剛) 기상은 예리하면서도 강했고

질의이온(質毅而溫) 자질은 굳세면서 온화 하였네

의이위간(義以爲幹) 의리로서 줄기로 삼고

충이위근(忠以爲根) 충으로서 뿌리를 삼았네

전성각적(全城卻敵) 성을 온전히 하고 적을 물리친 것은

여기공 (如其功) 누구의 공적이 이와 같겠는가

사어왕사(死於王事) 나라 일에 목숨 바친 것은

여기충 (如其忠) 누구의 충성이 이와 같겠는가

진산아아(晉山峩峩) 비봉산이 높고 높으며

진수양양(晉水洋洋) 남강물이 넘실거리니

일석천추(一石千秋) 비석하나 영혼이 전해져

산고수장(山高水長)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 하리

 

천년의 고도 진주가 430여 년 전 임진년의 대첩과 계사년의 진주성 함락으로 역사의 한이 맺힌 현장에 유서 깊은 유등 축제가 성황리에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면서 공북문(拱北門)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