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21.5.2. 의령군 문화유산을 찾아

雲山- 2021. 5. 3. 13:15

‘21.5.2. 의령군 문화유산을 찾아

930분에 柳辰熙(準堂)박사, 鄭一錫(瑞東). 朴亨濟(毅菴), 安守中(雲山) 넷이서 의령군 한우산(寒雨山) 정상 철쭉꽃을 보기 위해 나의 차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의령군의 문화재를 찾아 그 문화재의 중요성을 되새기기 위해 사진도 남겼다.

한우 산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으나 T-map 안내를 따라 가다보니 대의면을 지나 의령읍 가례면 사무소를 지나간다. 가례면사무소에 차를 주차하고 準堂 박사는 사무실에 들어가 당직 여직원(일요일)에게 가례동천(嘉禮洞天)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니 자기도 잘 모르지만 위치의 주소를 알려주어(의병로19-3), 準堂 박사의 아이패드로 위치를 알아내어 다시 온 길로 400m로 내려가 골목길로 들어가니 더 이상 갈 수 없어 방향을 돌아 오른편으로 조금 가니 주차장이 있고 안내판이 나온다.

 

嘉禮洞天은 퇴계 이황(李滉)선생의 처()가 곳으로 퇴계선생의 遺墟地이다.

가례동천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 큰 바위에 새겨진 가례동천 넉자 글은 조선중기 유학의 태두로서 東方夫子로 일컬으며 만인의 추앙을 받으신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 유묵(遺墨)으로서 소중한 향토문화 유적입니다. 퇴계선생은 진보인(眞寶人)으로 1501禮安에서 탄생하셨으며 영의정에 추증 되시고 시호는 문순(文純)이십니다. 이곳 가례 동은 선생님의 처가 곳진사 許瓚 공의 사위이라서 자주 내왕 하셨고 인근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어울려서 時文講論으로 소일 하셨던 유서 깊은 유허지(遺墟地)이자 동천복지(洞天福地)입니다. 무심한 세월이 흐르면서 주위 환경이 어수선해지고 안내판도 없어진지라 안타까운 터에 애향심이 남다른 同心會 회원들의 노력으로 정화사업을 추진하게 되었고 아담한 돌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가례마을은 두루 산으로 에워 쌓였고 맑은 시내물길이 감돌아 흐르는 경치가 썩 좋은 곳이라 뜻을 가진 이 암각유묵은 자랑스럽고 귀중한 문화유적인바 온전하게 보존되도록 모든 분들의 관심을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20038월 가례마을 동심 회, 동친 회 회원 일동이라 기록 되어 있다.

 

이곳 큰 바위에는 퇴계선생 유묵이 남아 있으며 退溪선생 遺墟碑퇴계 李滉선생 유허지 정화사업 기념비가 있다.

퇴계선생의 遺墟地를 뒤로 하고 다시 한 우산 방향으로 가다보니 가로수가 특이하여 사진을 남겼다. 도로 좌우로 잣나무가 잘 정비되어 정말 가로수를 잘 관리했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가로수 관리를 보니 벌써 몇 십 년 넘게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가로수를 심은 가례면 주민들을 칭찬하고 싶다. 잣나무 가로수를 계속 따라 가니 가례면의 농수용인 아주 큰못이 있고 끝자락에 정자가 있어 잠시 차를 주차하고 정자에서 瑞東이 가져온 과일과 과자를 먹었다. 다시 이동하니 보기 드문 열부(烈婦 ) 비각이 있어 차를 주차하고 烈婦 비각으로 갔다.

 

烈婦 창원 정병효(丁秉孝) 碧珍 李氏 行蹟碑의 기록을 요약하면 열부 이 씨 부인은 창원 정병효 에게 출가하여 부덕을 쌓음에 인근의 칭송을 받았으며 민족상잔의 6.25 사변에 부군이 참변을 당하여 그의 시신이 집으로 돌아옴에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다가 후사 없음이 걱정되어 시부모님께 그 뜻을 물었다. 이에 친족들은 이를 가련하게 여겨 그 형의 둘째 아들 어린 종상을 후사(後嗣)로 정함에 그제야 눈을 감아도 한이 없겠구나하고 남편의 시신 옆에 나란히 누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오륜(五倫)이 무너지는 이 시대에 이는 숭고비장(崇高悲壯)한 값진 죽음이었으니 고을 사람들은 이런 일이야 말로 진실로 열부라 할 만하다고 향내에 통문을 내고 열부의 사적비를 세울 것을 결의하고 유학자 문소인(聞韶人) 김황(金榥) 선생이 비문을 짓고 안악인(安岳人) 이현앙(李鉉昻)이 글을 섰다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열부 비를 뒤로하고 백연 암으로 이동하였다.

백연 암은 자굴산(897m) 으로 가는 지름길 우측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길이 좁고 경사가 심해 겨우 올라갔다. 이곳에 오르니 함안군 여항산과 봉화산이 멀리 보인다. 오늘은 유난히 날씨가 너무 화창하여 흰 뭉게구름이 하늘에 둥실 둥실 떠있는 듯하다. 스님은 지금 4월 초팔일(석가탄신일) 준비에 연등 다는 줄을 준비하고 있다. 대웅전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를 하고 우리 막내딸이 임신을 하도록 기원했다.

 

사찰의 위치가 워낙 높아 많은 산들이 사찰을 향해 읍하는 모습들이다. 내려 올 때는 경사가 심해 1단을 놓고 천천히 내려와 다시 한우 산으로 이동하였다. 한우 산이 가까워지니 앞으로 보이는 한우 산 능선을 따라 수많은 풍력발전소가 있다. 여기서 얼마나 많은 전력을 생산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원자력 발전소를 중지하다 보니 이렇게라도 전력을 생산해야 전력을 공급하지 않겠는가?

 

조금 오르니 한우 산(836m) 철쭉제 행사는 하지 않지만 수많은 차량이 서로 밀려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이곳은 쇠목재입니다, 라는 한우산과 자굴 산을 연결하는 터널이 보인다.

이곳은 의령 자굴산과 한우 산의 갈림길로 쇠목재에서 1.5km 올라가면 의령의 진산이 897m 자굴 산이다. 자굴 산에 갈려면 이곳에서 가는 길이 제일 빠르게 올라 갈 수 있다.

내가 자굴 산을 갔던 때는 수십 년 전 칠곡면 끝 마을에서 올라간 기억이 난다. 오늘은 한우 산으로는 차량은 못 가게 경비원이 안내하고 있다. 계획은 한우 산을 넘어 일붕 사로 가려고 하였는데 할 수 없이 칠곡면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내려오는 도중 오른편으로는 합천으로 가는 도로가 있고 왼편으로는 칠곡면으로 내려간다. 칠곡면에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했으나 식당이 없고 해서 다시 대의면 면소재지로 이동하였다.

우체국 앞에 소고기 국밥이 유명했는데 요즘은 다른 이름으로 변했고 식당도 운영하지 않아 여러 곳을 찾아봐도 유일하게 금오암소한마당 Tel.572-9400식당 한 곳 뿐이다. 오늘 식사 봉사는 毅菴께서 하였다. 너무 많은 과비를 하여 감사를 드린다.

식사 후 씨름 천하장사 이만기 고향인 마을에 미연서원(眉淵書院)이 있어 상촌까지 가 530년 된 은행나무보호수를 찾았다. 이나무의 유래를 보면 조선 인조 병자호란(1636)에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의 동생인 竹泉 허의(許懿)가 모친을 모시고 처외가가 있는 의령으로 내려와 있을 때 미수 허목 선생도 모친이 돌아가실 때 까지 의령에서 살았다고 한다. 허목선생이 대의면 행정리에 있으면서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고 또 한곳에는 3말의 은행 알을 부어서 심었는데 그곳에 지금의 소나무가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행정리라는 지명은 허목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대사헌과 우의정을 지내고 판중추부사에 까지 오른 미수 허목선생을 기리기 위해 중촌마을에 이의정(二宜亭)을 지어 영정을 모셔두고 매년 3월 초순에 제를 지내며 은행 알을 제물로 바치고 있으며 허목 선생의 시문을 모은 기언(記言)책판을 보관하고 있다.

 

다시 중촌으로 내려가 仁智門 앞에 차를 주차하고 인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운데 현판은 미연서원(眉淵書院:은초선생 ), 오른쪽에 이의정(二宜亭), 왼쪽에 전서로 쓴 二宜亭 현판 세 개가 걸려 있다. 그리고 文正公 眉叟 許先生 事蹟碑가 있고 許穆 眉叟記言 목판 유형문화재182안내 표시판이 있고 서원 뒤편에는 숭정사(崇正祠). 와 전서로 쓴 崇淵影堂현판이 걸려 있다.

미연서원 앞 양옆으로 서무 와 동무 건물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2호 허목 미수기언 목판 (許穆 眉叟記言 木板)

수량/869매 이며 지정(등록)일은 1979.12.29 이다.

소재지는 경상남도 의령군 충익로 1-25 (의령읍, 의병박물관으로 이관)

이 책판은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시문집인 미수기언眉叟記言을 간행하고자 만든 것이다.

허목은 23세 때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퇴계의 학문을 존중하였다. 이로 인해 스승 정구로부터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아 다시 그 학문이 이익에 의해 계승, 발전되는 구실을 하였다.

이것은 숙종 15(1689)년 임금의 명령에 의해 전남 나주 미천 서원에서 1차 간행되었고, 1905년 허찬이 중심이 되어 의령에서 다시 간행하였다.

구성을 보면 원집 67, 별집 26권인데, 원집은 허목 자신이 스스로 편찬한 것이고, 별집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문인들이 만든 것이다.

미연서원을 자세히 답사하고 동무에서 잠시 쉬면서 準堂 박사께서 오늘 준비해온 과일, 안주, 산초 浸出酒를 한잔 마시면서 오늘 의령군 한우 산 철쭉을 보려고 했지만 수많은 인파로 인해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의령군 문화유산을 많이 답사했던 문화재들을 서로 토론하였다.

미연서원을 나오는 마지막 출입문인 인지문(仁智門)毅菴께서 손수 잠그시고 문화재를 보존하는 마음을 다짐하였다. 인 지문 앞에서 주변 산을 살펴보니 산세가 자굴산과 한우산의 정기가 굽이쳐 흘러 내려와 앞쪽을 바라보니 마치 섬처럼 생긴 산이 유난히 서원과 마주치고 있다. 풍수지리설은 잘 모르지만 미연서원이 위치가 아주 명당자리처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