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21.6.10.하동군 문화유산답사

雲山- 2021. 6. 11. 18:08

‘21.6.10.하동군 문화유산답사

 

10시경 毅菴(朴亨濟) 선생께서 오늘 청학동 法聖庵에 가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를 고려치과에 내려주고 의암 댁으로 가니 앞에 나와 있어 함께 출발하였다. 가는 방향은 지리산 내대에서 산청-하동 터널을 지나기로 하였다. 지리산 입구에서 入德門에 잠시주차하고 취지문을 읽어보았다.

이곳은 조선명종6(1561) 南冥 曺植선생이 삼가로부터 덕산으로 오시면서 洞口天然門을 입덕문이라 명명하시고 자주 소요음영(逍遙吟詠)하시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근세에 도로개설로 옛 석문은 없어졌으나 선생이 남기신 精采遺香은 지금도 그윽하다.

입덕문 삼자는 선생의 高弟 陶丘 李濟臣선생의 필적이라 전한다. 후학들이 1960년에 入德門 保勝契를 일으켜 선현의 유덕을 추모하고 지리산 관문의 경승지 조성을 목적으로 德門亭을 신축 契員千名에 이른다. 암벽에 새겼던 입덕문 각자를 떼어서 두 차례(1982, 2004)옮겨

세운 사실을 기록하여 이 돌에 세운다.

2004년 갑신년 7入德門保勝契

 

다시 내대로 해서 산청-하동 터널을 지나 법성암에 도착하니 1130분이 되었다.

지금은 건물을 많이 신축하여 사찰로소 손색이 없다. 법당을 들어가는 출입 건물에는 智異山法聖庵, 대웅전은 應供福殿 (毅菴 書), 靈顯堂, 摩訶摩耶殿 山神閣. 달마스님조각상, 등이 잘 조성되고 마당은 모두 바다 자갈을 깔아 잡초가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의암과 나는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고 나오니 오늘이 마침 5월초하루라 몇몇 신도들이 불공을 드리고 주지 스님과 함께 점심 공양을 하기위해 나오고 있어 인사를 드렸다.

함께 점심공양을 맛있게 먹고 주지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악양면을 가려고 출발하였다.

 

 

청학동을 여러번 지나면서도 청학동 입구 에 거대한 출입문인 智異山靑鶴洞문을 촬영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차를 주차하고 촬영하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정자가 있어 휴식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효자비도 세워져 있다. 이 높은 청학동에도 효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孝子면천(沔川)朴公行績碑가 있다. 청학동 삼성궁 입장권을 판매하는 옆으로 가면 악양면으로 가는 임도가 있는데 몇 년 전에 악양면으로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출입을 제한하며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묵계 초등학교 앞에서 내를 건너 왼쪽으로 가다보면 다시 다리를 건너 가면된다고 일러준다. 내 생에 처음으로 가는 임도이고 마치 원시림 속으로 가는 느낌이다.

한참 오르니 성제봉(형제봉 1112m)과 깃대 봉을 가르는 안부(鞍部)가있다, 이곳에는 회남정(回南亭)이 있다.

회남재는 악양면과 청암면을 잇는 높이가 740m고개인데 조선시대 선비인 남명 조식선생이 1560년경 악양이 명승지라 말을 듣고 찾았다가 이곳에서 되돌아갔다 하여 회남재라한다.

회남정에서 악양면과 섬진강을 내려다보면 정말 天下第一景이다.

몇 년 전 만웅 친구와 둘이서 하루는 평사 리에서 회남정까지. 그 다음 일에는 회남정에서 깃대봉을지나 구재봉(768m)으로 하산하는데 2일간 산행을 하면서 악양면을 감싸는 산을 일주한 기억이 새롭게 느껴진다.

청학동에서 이곳 회남재 까지 어린가수 김다현의 사진과 김다현 양의 거리표시가 곳곳에 붙여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유튜브 우곡버전에도 수록되어 있지만 젊은 청년이 혼자서 여러 사람이 해야 하는 연주를 혼자서 섹스폰, , , 등으로 연주를 한다고 한다. 우리들은 폰으로 듣기만하고 그분과 헤어졌다.

 

 

오늘 악양면으로 가는 이유는 악양면에도 많은 문화재가 있어 답사하기 위해서이다. 먼저 악양면에서 북쪽에 위치한 조씨 고가(화사별서:花史別墅)를 찾았다.

몇 년 전에 이곳을 찾았지만 그때는 문을 닫아 내부를 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우리들뿐 아니고 많은 답사 자들이 와 있었다.

조 씨 고가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57호이며 하동 화사별서 (河東 花史別墅) 라고도 한다.

지정(등록)일은 2019.11.14 이며 위치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매개 리이다.

화사별서는 조선 개국공신 조준(조준1346~1405)의 직계손인 화사 조재희(花史 趙載憘, 1861~1941)가 낙향하여 건립하였다. 안채의 상량문에는 開國五百二十七年戊午三月初十日午時上樑 으로 적혀 있어 1918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소유자에 의하면 조재희가 이 집을 건립하기 위해 1902년에 착공하여 1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하동에서는 '조 부자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박경리의 소설인 '토지'에 등장하는 최 참판 댁의 배경이 된 고택으로 알려져 있다.

화사별서는 사랑채 등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채 등이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가구수법이나 규모가 가히 하동의 대표적 가옥으로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건축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의 풍류적 조원(造園)수법이 잘 적용되어 있어 근대 별장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연못조성이다. 연못 한가운데는 백일홍을 심었는데 연못의 물의 흐름이 특이하며 바깥에서 물을 유입 연못으로 흘러 바깥으로 흘러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점이 특이했다. 그리고 뒷편에는 사당으로 가는 계단이 있고 지금은 불타 없지만 사당 옆에도 삼칸 집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하동 녹차를 심어 재배하고 있다.

 

 

 

조 씨고가를 뒤로하고 국가산림문화자산 악양 취간림(翠澗林) 앞에 차를 주차하고 들어갔다.

숲속에는 팔 경루(八景樓), 충혼탑(忠魂塔), 지리산 항일투사 기념 탑 등이 있다.

악양 면민의 휴식공간이면서 면민들의 단합활동을 할 수 있는 좋은 숲이다.

끝으로 악양면 대축리 천연기념물 제491호인 문암송(文巖松)을 찾았다.위치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대축길 91 (축지리)이며 지정(등록)일은 2008.03.12 이다.

이곳 소나무는 높이가 약12m 둘레는 3m 정도이며 사방으로 퍼진 가지는 동서 16.8m, 남북12m가량 된다. 나무의 연령은 대략 600년 정도로 보고 있다.

축지리 문암송은 크고 편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자 있는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특이한 생육환경과 아름다운 수형은 식물학적, 객관적으로 가치가 크며,

또한 드넓은 악양 들녘이 전망되는 곳에 입지하여 경관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문인들이 즐겨 찾아 시회(詩會)를 열어 칭송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지역민을 중심으로 문암송계가 조직되어 보호되어 온 나무로 문화적 가치도 크다.

최근에 세운 성제봉 출렁다리가 이곳에서 훤히 보이는 곳으로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다시 내려오면서 제자 농업 신지식인 방호정을 만났다. 미리 연락을 하려고하니 농촌일손이 바쁠 때인데 제자들에게 신세를 기치지 않기 위해 그냥 내려오는데 뜻밖에 만나 반가워 인사를 나누고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 한마디로 그냥 돌아오다 보니 조금 아쉽기도 했다. 악양면 입구에 岳陽洞天이라 쓴 바위 앞에서 사진을 남겼다. 이 글씨는 의암선생의 스승 은초 정명수 선생의 글씨라 하니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악양루가 이곳 도로위편에 있었는데 다시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는 것은 하동군에서 크게 잘못하고 있다, 하루속히 유서 깊은 악양루를 복원을 기원하면서 진주-광양 국도를 따라 오면서 성지원(盛池苑758-5539)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집으로 무사히 귀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