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21.7.1. 하동 옥종, 산청 덕산 답사

雲山- 2021. 7. 2. 10:28

‘21.7.1. 하동 옥종, 산청 덕산 답사

  오늘은 準堂 柳辰熙 박사, 毅菴 朴亨濟와 나(雲山 安守中) 3명이 날씨도 무덥고 하여 하동 옥종 편백 자연휴양림으로 가자고 하여 11시경에 출발 하였다.

옥종면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되어 옥종면 하나로 마트 옆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청암면 방면으로 가다보니 오늘 목적지 하동 자연휴양림이 나온다. 경로는 무료입장이 되어 들어가 주차하고 위쪽 숲을 바라보니 산의 경사가 너무 급해 올라가기에 조금 무리했다.

여기 까지 왔으니 오르기 시작하니 땀이 흐르기 시작하여 정상 정자까지 갈 수 없어 중간에서 앉아 가져간 막걸리를 한잔하였다. 아래서 불어오는 시원한 공기와 편백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와 테르펜을 많이 호흡하였다.

이곳 자연휴양림은 홍보는 잘되었으나 막상 와서 보니 노인이 다녀가기는 무리한 코스이다. 그리고 아직 손님을 맞이하기는 부족했다. 먼저 앉을 수 있는 평상이나 숲속을 갈 수 있는 소로를 만들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내려오다 보니 이 숲을 조성한 김용지 선생의 흉상이 있었으나 더워서 그냥 지나쳤다. 입장할 때 주는 홍보물을 보니 편백 자연휴양림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생활하던 김용지 선생께서 6.25전쟁으로 벌거숭이로 변한 산야를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파 1970년 초부터 일본에서 편백나무묘목을 한해 1만주씩 가져와 이 일원의 헐벗은 산에 조림을 시작하여 일평생 편백나무를 80를 심고 가꾸어 오던 중, 이중에 30의 편백림을 하동군에 무상 기부 채납하여 국민 누구나 숲을 찾아와서 휴양할 수 있도록 이곳에 편백휴양림 조성에 큰 기여를 해주셨다고 한다. 편백휴양림을 뒤로하고

돌아올 때는 산청군 덕산방면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가다보니 산을 넘어 주산 밑에 있는 삼성연수원 아래로 지나 중산리에서 내려오는 지방도로와 연결되어 덕산으로 내려 왔다.

 

오다보니 마침 德和書院, 德山齋의 문이 평소 때는 늘 잠겨 있었는데 오늘은 대문이 열려 있어 답사하고 가자고 하였다.

입구 대문 위에 昌德門이 쓰여 있고 옆에는 호랑이석상과 大明處士 明庵 鄭拭 先生 遺墟碑가 우뚝 서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해태상이 양쪽에 서있어 마치 경복궁 궁궐에 들서는 느낌을 받았다.

들어서자마자 여러 마리의 개가 외부손님을 차단하고 있어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니 관리인이 나와 안내를 받아 답사의 뜻을 알리고 들어가니 내부의 건물을 알 수가 없어 3층 건물 계단으로 올라가니 전체가 보이나 내부는 알 수가 없어 내려와 德山齋彫刻公園으로 올라갔다. ‘仁慈한 모자의 라고 하는 조각상을 보고 무슨 의미인지 알 수 가없었다. 그리고 大明處士 明庵鄭先生 明德祠廟비석이 웅장하게 세워져 있다. ‘淑世精舍는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었으나 조각 규묘는 과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각공원 조성을 보니 과연 위대한 선비임을 알 수 있었다.

 

德和書院, 德山齋 정식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鄭拭(1683~1746)의 자는 경보(敬甫), 호는 명암(明庵),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1565~1624)의 아우 정문익(鄭文益)이 정식의 증조부인데, 이때부터 경상남도 진주에 정착하였다. 정식은 족형인 정구(鄭構)에게서 배웠다.

 

명나라가 망한 세상에 살면서 송나라 호전(胡銓)이 지은 척화소(斥和疏)를 읽고서 비분강개하여,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고 명암이라 자호(自號)하고는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 덕산으로 들어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살았다.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진주시민으로써 정식선생이 의암사적비 비문을 지으신 분이다.

의암사적비는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고 7만 민 관 군이 순절하자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의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현판이 붙은 비각 안에 있는 의암사적비는 1722(경종 2)에 진주 사람들이 의기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명암이 글을 지었다.

이에 앞서 정식은 경종1(1721)에 우병사 최진한(崔鎭漢)으로 하여금 논개의 포상문제를 조정에 계청 하도록 끈질기게 요청하였다.

이비의 비문에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라 새겨져 있다.

 

 

德山齋를 뒤로 하고 조금 내려가 선생의 무이정사(武夷精舍)로 이동하였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이곳을 찾아봤으나 찾지 못했는데 오늘 마침 준당과 의암은 이곳을 답사하였다기에 쉽게 찾아 갈 수 있었다.

오래된 은행나무만 찾아가면 된다. 들어가니 7대손 할머님이 친절히 맞이해준다.

정사는 그렇게 오래된 건물이 아니다. ‘무이정사武夷精舍현판을 비롯하여 은구실隱求室’ ‘청도헌聽櫂軒’ ‘주련柱聯’ ‘隱求室記’ ‘聽櫂軒記’ ‘武夷精舍重建記‘ ’隱求室記편액이 있다.

할머니께서 차가운 물을 주시면서 더위를 잠시 시켜가라고 친절이 배려주심에 너무 감사하다. 오늘 하동 편백 자연휴양림에서는 숲속을 거닐지 못했으나 산청 덕산 문화재는 감명 깊게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