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2. 제1회 문화재지킴이 날 기념식
아침 7시40분에 진주문화원 광장에서 33명 진주성지킴이 회원이 탑승하여 행사지인 내장산으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유임규 사무국장의 사회로 서로 인사교환과 강신웅교수께서 촉석루에 있는 편액글 詩 두수를 해석하였다.
敬齋 河演의 詩 풀이
高城絶壑大江頭(높은 성 깍은 벼랑 큰 강 머리에)
冬柏梅花矗石樓(동백 매화 우거진 곳에 촉석루가 섰네)
若也登臨留勝跡(만약 여기 올라 좋은 자취 남기려면)
請題佳句記吾州(훌륭한 글을 지어 우리고을 적어 두게나)
하연은 우왕(1376)2년~단종(1453)1년 문신이다. 호는 경재(敬齋) 본관은 진주이고 정몽주의 문인(門人)이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1499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간이 모자라 나머지 시 한수는 돌아갈 때 하기로 하고 다음은 박경묵 부회장께서 문화재지킴이 날 제정에 관한 설명을 하여 회원들이 충분히 오늘의 행사를 이해 할 수 있었다.
10시30분부터 행사가 시작되는데 조금 늦게 도착하였다. 입장을 하니 1,000여명의 전국문화재지킴이 회원들이 집결한 가운데 위대한 동행 전주실록 이안(移安)과정 재현 연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앞쪽으로 자리하고 촬영을 하였다.
약40여분 동안 연출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성주사고, 충주사고 등에 보관해 왔던 왕조실록이 20여일 만에 전소되고, 전주사고 본만 무사했으나, 이것도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당시 정읍의 선비 안의, 손홍록을 비롯하여 내장사 주지 희목대사와 민초들은 왕조실록을 전주사고에서 내장산으로 옮겨 지켜왔다. 문화유산을 지켜낸 이들의 훌륭한 정신과 가치, 역사적 상황을 무대에서 재현하였다.
11시15분부터 김호태 부회장으로부터 개회선언에 이어 국민의례, 내빈소개, 경과보고와 조상열 한국문화재 연합회장으로부터 대회사를 하였다.
이어 정읍 시장으로부터 환영인사를 하였고 축사는 김현모 문화재청차장, 유성엽 국회의원, 정읍시의회의장 순으로 축사를 하였다.
11시50분부터는 유공자표창을 끝으로 마지막에는 기념 촬영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점심시간이 되어 걸어서 15분가량 내려가 내장산 입구에 한정식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다시 버스에 승차하여 사찰 일주문 앞에 정차하고 전주사고를 보관했던 용굴로
답사하기위해 출발하였다.
일주문 두 기둥에는 우리지역 월아산 청곡사 일주문과 같은 글씨가 있다.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 不古) 일 천겁을 지나도 예가 아니며
긍만세이장금(亘萬世而 長今) 일만 세를 뻗쳐도 언제나 지금이다』
일주문을 지나 울창한 숲속을 지나면 내장사 사찰이 있다
사찰에서 왼편으로 용굴 까지의 거리는 1.8km 이다. 이 길은 옛날 내가 일삼산악회에서 내장산을 일주하면서 내려왔던 길이라 기억이 난다.
오늘 비록 무더운 초여름이지만 계곡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1.5km까지는 평지라 어렵지 않았지만 여기서부터는 계속 계단을 오르는데 무척 힘이 든다.
어렵게 올라가니 벌써 왔다 내려가는 회원도 많았다. 숨을 고르고 올라가니 드디어 용굴이 나타난다.
전라북도 기념물130호 표시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용굴암(龍窟庵)은 용굴대 또는 용굴 사라 불리웠으며 여러 문헌에는 실록과 어진이 함께 또는 용굴암과 은적 암으로 이안(移安)된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실록과 어진은 은적암에 이안(移安)하기로 결정하고 용굴암에 올라가서 살펴보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은적 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용굴암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실록과 어진 모두 용굴암을 거쳐 이안(移安) 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정조 때 실록과 어진을 보관한 봉안 처를 찾기 위해서 현지 조사를 실시한 기록이 전한다. 이에 따르면 그 당시 정읍현감 정동보는 용굴암까지 실사를 마쳤다. 그 결과 용굴암은 백여 년 전부터 나무꾼조차 다니지 않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 터는 영은사에서 서쪽으로 7리쯤에 있고 건물도 무너졌으니 20여척이 되는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주변에 30~40명이 들어 갈 수 있고 석굴(넓이 8.5m. 길이 8m. 높이 2~2.5m)이었다고 하였다. 이곳 동굴에서 383일간 보존하였다고 한다.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 기록에 의하면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편년채로 기록한 역사서이며 정치, 경제, 외교, 군사, 풍속,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는 백과서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편찬된 신록은 4부를 간행하여 춘추관, 성주, 충주, 전주사고에 보관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의 실록을 제외한 춘추관, 성주, 충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은 전란으로 모두 없어졌다.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 유일하며 보존될 수 있었는데 이는 정읍의 선비들이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지켜낸 결과이다. 정읍에 살던 선비 안의, 손 홍록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이 전주로 진격하고 있다는 급박한 소식을 듣고 전주사고의 실록과 태조 어진을 내장산으로 이안하여 온전하게 지켜 냄으로써 역사기록의 단절을 막아 냈다. 안의가 기록한 「임계기사」의 「수직상체일기」에 따르면 선조25년(1592)6월22일 신록은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기고 7월1일 태조 어진은 용굴암으로 옮겼으며 다시 7월14일 실록을 바래암으로 옮기고 9월28일 태조어진도 바래암으로 옮겼다. 이후 선조26년(1593)7월9일 내장산을 떠나 정읍현으로 옮겨 갈 때까지 실록과 어진이 보존된 사실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자료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구전과 기록으로 전해오던 내장산 「조선왕조실록」보존 터였던 용호암, 은적암(은봉암), 바래암 터가 확인되었다.
용굴과 은적 암을 답사하고 내려오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내장사 사찰 경내를 답사하고
대웅전 부처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버스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니 오후 3시40분이 되어 백양사를 들리려고 했으나 시간 관계상 가지 못하고 진주로 돌아 왔다. 돌아오면서 아침에 다하지 못한 촉석루 두 번째 詩를 강신웅 교수께서 풀이 하였다.
農圃 鄭文孚 詩
龍歲兵焚捲八區(임진년 난리가 조선 팔도에 휩쓸 적에)
魚殃最慘此城樓(재앙은 이 성루가 가장 처참했다오)
石非可轉仍城矗(구르지 못하는 돌은 바로 촉석이 되어 섰건만)
江赤可心自在流(그래도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만 가네)
起廢神將人共力(신도 사람을 도와 일으켜 주려 하는데)
凌虛天與地同浮(침범을 당한 이 세상 온통 들떠만 있네)
須知幕府經營手(모름지기 알 것 같은 이 고을 다스리던 솜씨)
壯麗非徒鎭一州(장하고도 훌륭한데 어찌 한 고을만 지키랴)
정문부는 (명종20. 1565~인조2.1624) 공의 시호는 충의공이시고 호는 농포이며 본관은 황해도 해주이다. 임란 때 의병대장이 되어 경성, 길주, 회령을 수복하여 일본을 도왔던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어 박경묵 부회장께서 사찰에 있는 현판을 설명하였다. 대웅전, 적멸보궁, 극락전, 명부전 칠성단 나한전 등 불자가 아니더라도 상식으로 알아두어야겠다.
오늘 제1회 문화재지킴이날 행사를 전국으로 홍보하여 국경일로 추진할 것을 결의하고 또한 정읍시에서는 문화재지킴이 전국엑스포를 개최할 것을 추진하고 있으며 또한 이곳 내장산 용굴을 사적지로 정해줄 것을 문화재청에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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