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20.10.29. 무산사(武山祠) 참배 및 周世鵬선생 묘역 참배

雲山- 2020. 10. 30. 19:35

 오늘 행사를 위해 순흥안씨대종회 회장께서 몇 년 전부터 주세붕선생을 배향한 무산사를 참배하려고 계획을 해오던 중 비로서 오늘을 택해  안태영부회장께서 회장님을 모시고 이곳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 544번지 무산사에 12시경에 도착하였다. 순흥안씨 대종회 회장님이 오시는데 우리 경남에 있는 순흥안싸 1파와 3파 종원들은 회장님을 맞이하기 위해 11명이 미리 무산사 復禮之院 교육관에 도착하여 이곳 무산사 주원식 사무국장의 주세붕선생에 대한 소개와 복례지원을 건립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시는데 정말 노고가 많았음을 알았다. 취우정 종회에서는 오늘 고유제를 모시기 위해 제물준비를 하여 미리 제물을 차리고 고유제를 올릴 준비를 하였다. 미리 영정을 펴고 앞에 제물을 차리고 자리도 깔고 우리들이 제를 지낼 준비를 마련하였다. 오늘 진행은 주원식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하였으며 초헌관에 순흥안씨대종회 안덕주 회장님께서 초헌례를 올리고 대종회 임원께서 고유제문을 독축하였다. 아헌관은 양도공 종회 안태영부회장께서, 종헌관은 경남 1파 직장공파 안인영회장이 종헌례를 올였다. 그러고 나서 삼헌관 사진과 전 참여종원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엄숙히 고유제를 마쳤다. 오늘 고유제를 하면서 느낀 점은 보통 봉심을 할 때는 주세붕선생 신주만 고유하느것으로 알았는데 할머니 두 분과 함께 삼잔을 올렸다. 그리고 영정을 보게 되니 신주를 앞에 두지 않았는게 이상이 여겼다. 우리가 전국 서원을 방문하여 봉심을 할 때는 신주를 앞에 모시고 제를 올리는데 조금 특이하다는 점을 느꼈다. 제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敬자 바위와 다음 글을 새긴 비석이 있었다. 『恭敬如形影表恭由內敬 書紳貴子張參倚方言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恭과 敬은 형체와 그림자와 같으니, 표면의 공손함은 마음의 공경을 말미암은 것이다. 띠에 글을 쓴 것은 (공자제자) 자장이 (忠信篤敬이) "앞에 참여 해있는 듯하고 수레 대에 기대어 있는 듯 言行을 方正히 해야 한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귀히 여긴 것이다. 』 번역은 진주 鳳林書堂 誠齋 許萬秀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셨다. 이곳 함안 무산사 (咸安 武山祠)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周世鵬(1495∼1544) 선생의 영정과 유품을 모신 곳이다. 선생은 중종 38년(1543)에 백운동 서원을 세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으며, 이를 기리기 위하여 숙종 24년(1698)에 선생의 후손이 세웠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유림들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불탔다. 현재의 무산서당은 그 후에 세운 것이다. 광풍각(光風閣)에는 주세붕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장판 각에는 『무릉잡고』·『수구집』·『귀봉집』책판 352매가 보관되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2호 주세붕초상 (周世鵬肖像) 화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주세붕(1495∼1554) 선생의 초상화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을 옮겨 그린 것이다. 크기는 가로 100㎝, 세로 150㎝이며, 매화와 대나무 무늬가 선명한 비단 바탕에 엷게 채색한 것으로, 직무를 볼 때 입는 관복을 입고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전신좌상이다. 호랑이 가죽을 덮은 의자 위에 앉아 있는데 가죽의 색깔과 녹색의 조복이 잘 어우러져 있다. 풍만한 얼굴 인상과 큼직한 눈과 코, 짙은 눈썹은 마치 무인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58세 때의 선생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원본을 1919년에 그 후손들이 다시 옮겨 그린 것으로, 그림이 보존되고 있는 광풍각 또한 당시 그림을 모셔두기 위해 12대손인 주학표가 세워 놓은 것이라 한다. 점심식사는 삼한식당에서 미리 준비를 해두어 대종회 회장님을 비롯하여 5번 건배를 하면서 안 씨와 주 씨 간의 우의를 더욱 돈독하도록 마음을 함께 했다. 식사 후 서울에 가시는 세분을 보내드리고 우리들은 주세붕선생의 묘역을 참배하기로 하였다.

주원식 사무국장의 안내로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에 있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33호 함안 주세붕 묘역 (咸安 周世鵬 墓域) 에 도착하여 주원식 사무국장의 설명을 들었다. 이곳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신재(愼齋) 주세붕(1495∼1554) 선생의 묘소로 중종 17년(152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중종 36년(1541)에 풍기 군수가 되었다. 중종 38년(1543)에는 풍기 지방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뒤의 소수서원)을 세웠다. 명종 6년(1551)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해주에 수양서원을 창설하여 최충을 모시기도 하였다. 죽은 뒤 선생의 유언에 따라 고향에 장사 지내고 조정에서는 예조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선생의 묘는 3기의 묘 중 가운데 위치하는 둥근 무덤으로 앞에는 묘갈과 상석이, 옆에는 비석과 망주가 잘 갖추어져 있다. 사각의 망주에는 '누구인들 부모가 없으며(誰無父母), 누구인들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孰非人子).'라는 시경의 글귀가 새겨져 있어 그의 효성을 잘 보여준다.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도굴을 할려고 하다 위 두비석의 글을 보고 그냥 지났다고 한다. 묘역 위쪽의 네모난 무덤은 아버지 문보(文補)와 어머니 창원 황 씨를 함께 모셨다. 무덤주위는 잘 다듬어진 둘레돌과 상석이 갖추어져 있고, 둘레돌의 표면에는 가계 현황이 기록되어 있다. 아래쪽에 둥근 무덤은 큰 조카 조(造)의 묘이다. 현재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에는 주세붕풍기군수가 백운동서원을 세웠으며 터가 그 옛날 숙수사 절터였는데 그곳에 안향(安珦)선생을 기리며 교육기관인 서원을 세웠다.그후 퇴계선생이 다시 이곳 풍기군수로 와 임금께서 이름을 지어 내린 최초의 사액(賜額)서원이자 사학(私學) 교육기관이 되었다. 이곳 소수서원에는 晦軒 文成公 安珦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文貞公 安軸 선생, 文敬公 安輔 선생, 文敏公 愼齊 周世鵬선생을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