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12. 진주시 금산면 琴湖池
오늘은 毅菴(朴亨濟)선생께서 점심을 청곡사 앞 삼계탕 식당에 가자고 하여 둘이서 청곡사
앞으로 갔다.
이날따라 이곳 식당에는 많은 차량이 줄지어 있어 무슨 행사를 하는가 보다 하여 들어가지 않고 금산면 금호지 주변 식당으로 갔다. 마침 이곳에 왔으니 전번에 딸 민영과 妻가 함께 와 금산 못을 일주하는 산책을 하였다. 그때 퇴계(退溪)선생 유적비를 보았는데 오늘 의암과 함께 다시 답사하기로 하였다.
금호지 유래
금산면사무소로부터 약400m 지점의 금산면 용아리에 소재한 금호지는 전체 면적이 20만4937㎡에 달하는 큰 저수지로 예로부터 내려오는 금호지의 전설은 무척 흥미롭다.
옛날 옛적에 황룡과 청룡(혹은 흑룡)이 하늘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 어느 용사가 "싸움을 멈추라”고 소리치자 청룡이 놀라 아래를 보는 순간 황룡이 청룡의 목을 비수로 찔렀다. 청룡이 땅에 떨어지면서 꼬리를 치니 그 꼬리에 쓸려 갑자기 하나의 큰 못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의 금호지로, 금호지는 청룡을 닮아 항상 물이 맑고 푸르다고 한다.
또한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금호지를 둘러 봤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안 둘러 봤다”라고 하면 게으른 놈이라고 벌을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저승까지 이름이 난 저수지이고 보면 용이 있다는 전설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금호지는 둘레 5km로 굴곡이 많아 한눈에 저수지의 전부를 볼 수 없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신라시대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추정만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금호지가 워낙 깊어 명주실구리 3개가 들어갔다는 옛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주위에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아름다워 사시사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명소이기도 하다.
이금호지 수면위로 월아산 해뜨는 풍광은 진주시 8경에 속하는 비경으로 으뜸이다.
퇴계(退溪)선생 유적비
퇴계선생이 1533년(중종28) 월아산 청곡사를 지나며 남긴 시로 이시는 선생의 숙부 우(堣)가 진주 목사로 있을 때 형 해(瀣)가 청곡사에 머물렀던 옛일을 생각하며 읊은 글이다. 이에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용심마을 후학 도계(陶溪) 이희영 이 못 한가운데 금호대를 쌓고 선생을 흠모하여 시비를 앉힌 것이 둘 중의 하나이고 윗몸이 훼손된 빗돌은 그의 아들 수용이 대와 시를 새겨 앞뒤로 기록한 유적비(遺蹟碑)이다. 못을 가로 지른 다리가 놓이면서 옛 모습이 달라져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금산도상만봉우(金山道上晩逢雨) 금산길 지나가다 늦게야 비 만나니
청곡사전한사천(靑谷寺前寒瀉泉) 청곡사 앞 솟은 샘물 차기도 하네
위시설니홍조처(謂是雪泥鴻爪處) 세상 일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 같아
존망이합일산연(存亡離合一潸然) 옛사람 간곳없이 또한번 눈물짓네
하모(잘 될거야)
금호지 교각 옆에 못 위에 수달캐릭터를 높이 세웠다. 하모는 진주시의 남강과 진양호에 서식하는 수달로 긍정을 의미하는 진주방언 ‘하모’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지친 대한민국 국민과 진주시민을 응원하고 모두 함께 어려운 시기를 이겨 나가자는 취지로 제작되었다.
교각을 지나 못가에 못을 향해 자란 오랜 소나무 세 그루가 기이하다. 의암선생이 고교시절 이곳을 지날 때도 웅장하게 자라 있었다고 하니 이 소나무 수령은 오래 되었을 거라 여겨진다.
그리고 소나무 앞쪽에는 鄭氏 재실이 있는데 재실 앞에도 퇴계선생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정씨 재실 현판 金湖亭은 星坡 河東州선생님의 글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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