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18.2.23~25. 강원도 문화유적 답사

雲山- 2023. 9. 11. 17:51

‘18.2.23~25. 강원도 문화유적 답사

이번 여행은 삼봉회 회원 전원이 참석 못하고 희망회원 7명이 함께 병오 봉고 차량을 이용하여 23일 동안 강원도 일대를 가보지 못한 곳을 답사하였다.

나는 23일 아침 6시 진주 발 첫 버스로 8시에 부산 사상역에서 친구와 만나 병오 차로 강원도 원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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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산 출렁다리

오늘 첫 목적지는 원주시 지정면 소금산길 26 에 있는 소금산 출렁다리 이다.

이곳은 최근에 개통된 출렁다리로 방송에 많이 보도되었든 곳이다.

이곳은 간현관광지로 원주에서 서쪽으로 17km 떨어진 섬강과 삼산천 강물이 합수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검푸른 강물 주변으로 넓은 백사장과 기암괴석, 울창한 고목이 조화를 이루고 강의 양안으로 4050m의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관광지를 감싸고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송강(松江) 정철(鄭澈)한수(漢水)를 돌아드니 섬강(蟾江)이 어디메뇨, 치악(雉岳)은 여기로다라고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그 절경을 예찬하였듯이 섬강의 푸른 강물과 넓은 백사장, 삼산천 계곡의 맑은 물에 기암, 준봉이 병풍처럼 그림자를 띄우고 있어 더욱 운치를 더하고 있는 곳이다.

소금산 출렁다리를 가기 전에 점심시간이 되어 원주시 지정면 간현로190에 있는 소금산 한식뷰페에서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앞에 마을정원에 조그만 동상이 있었는데 살펴보니 문익공 조엄( 文益公 趙曮) 선생 동상이다.

176383일 영조 임금은 好往好來(잘 갔다 잘 돌아오다)의 글을 써서 통신사의 정사인 조엄에게 하사 하였으며, 험한 바닷길, 수개월간의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오라는 임금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1763(영조39)통신 정사로 일본에 가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우리나라 최초로 고구마 재배에 성공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다시 이동하여 10여분 가니 소금산 출렁다리 주차장이 나온다. 우리일행은 임시주차장에 정차하고 산을 넘어 천을 지나 입구부터 나무 계단으로 시작되어 500m를 오르는데 집사람은 허리가 아파 빨리 갈 수가 없어 천천히 쉬어 가면서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니 약200m나 되는 출렁다리가 이곳 정상에서 저편 정상과 연결한 출렁다리가 있다. 오늘은 마침 평일이라 그렇게 많은 인파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산행인과 여행객들이 모이는 국내 유일의 다리로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여기서 사진을 남기고 저편 정상으로 건너가는데 다리의 높이가 너무 높아 아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공포감이 느껴진다. 나는 앞쪽 산만 바라보고 건너갔다. 이곳에서도 사진을 남기고 하산할 때는 왔던 길로 가지 않고 뒤편으로 내려가는 코스가 있어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강원도 깊은 계곡의 청정 산소를 마시면서 정말 힐링 할 수 있는 곳이다.

주차장에 내려오니 많은 상인들이 북적대고 있고 각종 상품도 전시되어 있으며 송강 정철선생의 시를 적은 큰 바위가 인상적이다.

두 번째 답사지는 오늘 저녁을 묵을 수 있는 고석정(孤石亭)으로 이동하였다. 오후 7시가 가까워오니 해는 저물어 어두워 오고 있는 시간에 고석정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고석정을 내일 답사 하겠지만 위치만 알고 오려고 혼자 가보니 정말 경치가 아름다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답사하가로 하고 숙박할 펜션을 알아보니 마침 오늘은 평일이라 우리만 투숙하였는데 고석정 펜션(전화 010-6364-7233)이다.

시설을 보니 가족이 오면 이곳에서 전부 음식을 해먹을 수 있어 좋겠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식사도 이곳에서 하였다. 식사 전에 어제 저녁에 못가 본 고석정을 모두 함께 산책 겸 답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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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정 (孤石亭) 은 시도 기념물 제8호로 소재지는 강원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725번지이며 고석정은 한탄강변에 있는 정자이다.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적 임꺽정(林巨正)은 이곳의 자연석굴에 은거하며 활동하였다고 전하며 강 건너 편에는 그가 쌓았다고 하는 석성이 남아 있다. 후대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 짓고 고석정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현재 2층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져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다.

계곡에서는 보기 드문 하얀 모래밭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천혜의 관광지로 청소년들의 렙틴으로 즐길 수 있고, 또한 뱃놀이도 할 수 있는 곳으로 주변 관광지를 두루 답사 할 수 있어 가족 단위로 꼭 올 만한 곳이다.

숙소에 돌아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철원관광정보센터 전시실을 둘러보고 다시 나와 관광안내소에서 오늘 답사할 철원 민통선구역 안에 들어가 안내원이 인솔하면서 해설을 해주는 답사를 하게 되었다.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는 이곳은 군인들이 철저히 점검을 하고 들어갔는데 제일 먼 저 철원 제2땅굴로 이동하였다.

 

2땅굴

북한이 판 남침용 땅굴로서 북한에서 군사분계선(휴전선)까지 2,400m,군사분계선에서 우리 쪽으로 1,100m,3,500m를 남북대화를 하는 시점에서도 파내려왔다.

19731120일 최전방에서 경계 근무하던 초병2명이 지하의 아주 작은 폭음소리를 듣게 되어 청음활동을 강화하던 중, 땅굴이 있는 것으로 확신을 갖고 당시 농업진흥공사가 지하수 개발로 도입한 시추 장비를 투입하여 총45개의 시추를 뚫어 이중 7개가 적의남침용 땅굴에 정확히 관통되었고, 197531~324일까지5공병여단 과 현대건설 합작의 역 갱도공사(108m)를 하여 북괴의 남침임을 확인 하였다.

북한이 땅굴을 팠다는 세 가지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이너마이트 장전공의 방향이 북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

둘째. 갱도 배수로의 방향이 남에서 북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

셋째. 북한과 우리 대한민국의 굴착 공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북한이 파내려온 그간은 폭발 공법을 이용 벽면이 그을린 반면 우리대한민국은 역굴시 대형 굴착기를 이용하여 벽면색깔의 변함이 없다.

현재 북한에서 파내려온 땅굴은 4개이며 제 1땅굴(7411.5일 고랑포 동북방 8km).

2땅굴(753.19 철원 북방 13km). 3땅굴(7810.17 판문점 남방 4km)

4땅굴(90.3.3 양구 동북방26km)가 있다. 다음 안내는 철원 평화 전망대로 이동하였다.

 

철원 평화 전망대에 가는 방법은 모노레일카로 가는 방법과 걸어서 가는 방법이 있는데 모두 1인당 천 원 씩 내고 모노레일카로 이동하였다. 안에 들어가서는 사진촬영은 하지 말라고 한다. 전망대에서 이미 녹화된 마이크로 설명을 들었다. 군사분계선을 기점으로 북방2km까지 북방 한계선, 남방 2km를 남방한계선으로 철조망이 쳐 있다. 전망대에서 보면 바로 앞에 북한 낙타 봉이 보이며 그 뒤에는 인구11만이 사는 평강시가 있고 개마고원처럼 보이는 넓은 고원이 평강고원인데 주로 감자, 옥수수를 재배한다고 한다. 780김일성고지, 백마고지. 비무장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한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은 비무장지대를 지나 우리나라 철원 동송 저수지에 모여 철원평야 농업용수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다음은 철원두루미전시관으로 이동하였다.

철원두루미전시관에는 많은 철새 및 동물들의 박제가 있다. 철원 평야 겨울 철새 도래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두루미(202), 재두루미(203), 독수리(243)가 해마다 겨울철이면 찾아오는 지역으로 겨울 철새들의 월동지로서 천연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이 전시관에는 철원지방의 동물들을 박제하여 전시해두었다. 바로 옆에는 월정역이 있다.

월정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하는 글이 새겨진 우리나라 마지막 철도역이다. 원래는 이역이 남한한계선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달리던 열차가 포격당해 녹이 쓸어 그대로 전시되어 있으며 6.25전쟁의 참혹상을 볼 수 있었다. 이곳까지 해설사가 안내하는 답사는 모두 마치고 들어왔던 민통선 입구에서 헤어지고 우리들은 백마고지 전적지 로 이동하였다.

백마고지 전적지 는 백마고지 전승비. 백마고지 기념관, 그리고 위령비가 있는 위령탑을 답사하고 제일 뒤편에 상승각(常勝閣)에 오르니 바로 남한 한계선 안에 있는 백마고지가 보인다.

백마고지 전투지는 철원읍 신평리 산215 일대이며 195210월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과 6.25전쟁 시기 가장 치열하게 고지 쟁탈전을 전개하였던 곳이다.

1952106일 철원 서북방395고지(효성산 남단)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제38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1015일 까지 열흘간 395고지를 사이에 두고 12차례 전투가 반복되면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22) UN군의 지원을 받은 국군 제9사단은 마침내 고지를 장악하였다. 전투과정에서 국군 9사단은 총 34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중공군은 14천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포로가 되었다.

황폐화된 고지는 마치 하얀 말이 누워있는 것 같다하여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다.

이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부른다. 9사단을 백마고지 전투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 사단이라고 명명되었다. 내려오면서 북한노동단사무소 앞에서 주차하고 앙상한 건물형체만 남아있는 이곳은 등록문화재 제22호 철원 노동당사 (鐵原 勞動黨舍) 이다.

철원 노동당사 (鐵原 勞動黨舍) 소재지는 강원 철원군 철원읍 금강산로 265, 3필지 (관전리) 이며 1946년 공산치하에서 지역주민들의 강제 노력동원과 모금에 의해 완공된 지상 3층의 건축물이며,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건축적 특징과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이 건축물은 언덕을 이용한 기단의 설정과 대칭적 평면, 비례가 정돈된 입면의 사용으로 공산당사로서의 권위를 표현하고 있다.

일부 구조 체의 철근콘크리트 사용과 벽식 구조의 혼용, 화강석과 콘 클리트, 벽돌 및 목재의 혼용은 당시의 건축일면을 엿볼 수 있으며,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증언하는 중요한 자료로 현재 안보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철원지역의 6.25동족상잔의 아픔의 상처를 뒤로하고 한탄강 주변의 풍광을 자랑하는 미국 나이가라폭포 축소판인 철원 8경중 하나인 직탕폭포(直湯瀑布)를 답사하였다.

직탕폭포(直湯瀑布)를 답하고 이곳 가든에서 점심을 먹고 삼부연 폭포(三釜淵瀑布)를 가면서 등록문화재 제26호 철원 승일교를 통과하였다.

원 승일교는 높이 35m, 길이120m, 8m 로 소재지 강원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725번지 갈말읍 내대리 산61-1 이다.

19488월부터 공산당 치하에서 철원 및 김화지역 주민들이 노력공작대라는 명목 하에 총동원되어 6·25 동란으로 중단될 때까지 다리의 북쪽 부분만 시공되었다가 1958년 우리정부에 의해 완공되었다.

아치의 크기 등 교각의 구조체가 외관상으로 구별될 정도로 다리의 중심부에서 남북으로 각각 다르게 시공되어있으며, 남북분단과 전쟁의 독특한 상황으로 인해 만들어진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조형미가 돋보이는 교량이다.

다음 코스는 삼부연 폭포로 이동하였다.

삼부연 폭포는 철원 8경중 하나로 3단 폭포로서 가마솥처럼 생긴 소 3개를 만들어 놓았다하여 삼부연(三釜淵)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궁예가 철원의 풍천원에 도읍을 정할 당시 이곳에서 도를 닦든 4마리의 이무기 가운데 3마리만 폭포의 기암을 각각 뚫고 용으로 승천하였으며 그때 생긴 혈연이 가마솥 모양 같다하여 삼부연(三釜淵)이라 명명되었고 그 후 마을 이름도 용화동이라 부러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철원지역의 유적지를 모두 마치고 오늘 묵을 속초시 로 이동하였다. 오후 7시경 도착하니 태풍이 부는 건지 나무가 뽑혀나갈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러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차가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세차다.DEL PINO호텔(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미시령 옛길 1153 :T-1588-4888) 여장을 풀고 한식으로 저녁을 하고 호텔로 들어와 오늘 피로로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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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730분에 호텔에서 출발하여 속초시 바다향기로 에 이동하였다.

바다향기로 입구에 들어가니 문이 잠겨 있어 보니 9시부터 개장하는 모양이다. 입장료도 없으니 옆으로 해서 들어가니 별 무리가 없었다.

초시 외용치 바다 향기로는 6·25전쟁 이후 60여 년간 민간인 출입을 통제한 강원 속초시 외용치 해안이 개방되었다.

국비 7900만 원 등 모두 30억 원을 들여, 속초해수욕장외옹치 해안간 2산책로가 완공되었는데 외옹치 해안은 휴전 이후 일반인 출입이 사실상 통제돼 온 곳으로 19706월 무장공비가 침투하면서 해안경계 철조망이 설치되고 출입금지가 더 엄격해졌다. 해안 산책로 일대에는 1970년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곳임을 관광객들에게 알리고자 기존에 설치된 해안경계 철책을 그대로 둘 예정이며, 군부대 벙커나 초소는 전망대로 활용할 방침이라고 한다.

중간쯤 가다 다시 돌아 나와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주문진 항구로이동하여 마침 부산 사람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맛있게 아침 식사를 하였다.

다음은 정동심곡바다부채길 로 이동하였다.

 

정동심곡바다부채길

천연기념물 제437호 강릉 정동진 해안단구 (江陵 正東津 海岸段丘) 이며

소재지는 강원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산50-60번지 등 4필지이다.

정동진 해안단구는 제3기말에 일어난 지반융기작용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해석되며 단구 층은 20025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

해안단구가 해수면과 접하는 곳에 경사가 급한 암벽인 해식애가 존재하는 것은 이 지역의 기반암이 주로 사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오랫동안 파도의 침식작용에 의하여 깎아졌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437호로 동해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2300만 년 전 지각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의 해안단구 관관지이다. 2.86km로 동해바다의 푸른 물결과 웅장한 기암절벽 석화등 천혜의 비경을 감상 할 수 있는 곳이다.

 

다음은 삼척시에 있는 천곡천연동굴로 이동하였다.

천곡 천연동굴의 위치는 강원도 동해시 동굴로 50 (천곡동) 이다.

동해시 천곡천연동굴은 총길이 1,400m의 석회암 수평동굴로서 생성이기는 4~5억 년 전으로 추정되며, 국내에서 유일하게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국내 최장의 천정용식구, 커튼형 종유석, 석회화단구, 종유폭포 등과 희귀 석들이 한데 어우러져 학술적 가치와 함께 태고의 신비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내부는 종유석, 석순, 석주 등 20여 종이 2차 생성물로 구성되어 있어 지구과학에 대한 자연학습장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우주의 탄생과 동굴의 생성과정 등 동굴의 생태계 전반에 관한 이해를 돕고,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 전시관과 영상 실이 설치되어 있다.

날씨가 바깥은 더웠으나 동굴 안에 들어가니 너무 시원하여 잘못하면 감기가 올 것 같다. 다음은 촛대바위로 이동하였다.

 

촛대바위 위치는 강원도 동해시 촛대바위길 26 (추암동)이며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 바닷가에 있는 바위이다. 추암 바닷가에는 능파대(凌波臺)가 있다. 산과 바위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원래 용추(龍湫)라 했던 곳인데, 1463(세조 9)에 한명회가 동계를

순시하다가 그 위에 올라 관상하고 능파대라 했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삼척에서는 바다의 절경으로 소금강이라 했으며, 척주팔경(陟州八景) 중 하나다. 능파대 앞에는 높이 5~6길쯤 되는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모양이 촛대처럼 생겼다 해서 촛대바위라 한다. 척주지"추암(楸岩)은 삼척부 북쪽 15리 바닷가에 우뚝 높이 솟아 있는데, 바다로 들어갈수록 그 모습이 더욱 기이하다. 추암 서쪽 바위에는 신우(神牛)의 수레바퀴 자국이 있다. 그 북쪽의 굴암(窟岩)은 추암(湫岩)과 마주보고 있는데 해상명구(海上名區)라 일컫는다."는 기록이 있다. 추암은 일군의 바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촛대바위는 추암 중 촛대처럼 생긴 바위 하나만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촛대바위라는 이름은 후대에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추암(錐岩)이라고도 한다. 바위가 원래 2개였는데, 그중 하나가 1681(숙종 7) 강원도에 지진이 났을 때 중간 부분이 부러졌다고 한다. 이 기묘한 바위들은 파도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동해팔경 중 하나이다.

마지막 답사지인 죽서루로 이동하였다.

삼척 죽서루 (三陟 竹西樓) 보물 제213호이며 소재지는 강원 삼척시 죽서루길 44 (성내동)이다.

이 건물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고려 원종 7)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 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7·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기둥을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춰 직접 세운 점도 특이하다.

이 누각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1662)에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1711)에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주변 두타산의 푸른 숲, 삼척시의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있어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많은 편액중에 2편액의 번역을 소개한다.

正祖御製

彫石鐫崖寄一樓 돌에 새기고 언덕에 새겨 한 누각에 부치니,

樓邊滄海海邊鷗 누각의 가에 창해가 있고 창애 가에 해오라기 있네.

竹西太守誰家子 죽서의 태수는 누구의 아들인가

滿載紅粧卜夜遊 단장한 미인을 가득 싶고 밤놀이를 점치리라.

金忠顯謹錄

 

竹西樓 松江 鄭澈

關東仙界陟州樓 관동의 선계에 의 누각에 올라,

虛檻憑危夏亦秋 빈 난간 위태하게 기대니 여름도 또한 가을처럼 시원하다.

天上玉京隣北左 하늘 위의 옥경은 북두의 왼쪽에 이웃했고,

夢中銀漢聽西流 꿈 가운데서 은하수가 서쪽으로 흘러감을 듣는다.

疎簾欲捲露華濕 성긴 주렴 걷고자 하니 이슬 꽃이 젖었고,

一鳥不飛江色愁 한 마리 새도 날지 않으니 강 빛이 근심스럽다.

欄下孤舟將入海 난간아래 외로운 배 장차 바다로 들어가니,

釣竿應拂鬱陵鷗 낚시 대는 응당 울릉도 해오라기를 쫓으리라.

번역 허만수 선생

 

오늘 죽서루를 끝으로 답사를 마치고 진주로 돌아오면서 많은 것을 상상하고 간직하고 싶다.

1953년 정전 협정으로 지금은 총성이 멎었지만 6.25 전쟁이 남긴 아픈 우리나라 철원 일대의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였고 또 절실히 동족의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철원군 고석정 펜션에서 잠을 깨어보니 이른 아침에도 장병들의 훈련으로 포 소리가 쉼 없이 들리는 것을 보니 최전방을 지키는 우리 국군 장병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아름다운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정말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이다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였고 우리문화유산을 우리가 잘 보존해야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집으로 귀가 합니다.

이번 여행은 삼봉회 회원 전원이 참석 못하고 희망회원 7명이 함께 병오 봉고 차량을 이용하여 23일 동안 강원도 일대를 가보지 못한 곳을 답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