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23.07.01~07.02. 가족모임 충남 서산, 예산

雲山- 2023. 7. 3. 19:00

‘23.07.01~07.02. 가족모임 충남 서산, 예산

오늘은 채근 손녀 결혼식이다. 오남매 가족 모임과 날자가 겹쳐 먼저 결혼식에 참가한 후 예약된 펜션으로 가려고 한다.

진주에서 9시에 류서방 차량으로 5명이 승차하여 1020분경에 창원시 진해구 JK컨벤션 게이트 가든 에 도착하니 상욱 조카와 질부, 손자 태철이 와 있었다. 조금 있으니 부산 큰질부 형제 와 조카 상전내외 일가친척들이 모여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조카들을 모처럼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세월이 흘러 얼굴도 많이 변모하였다.

결혼식을 시작하여 끝까지 보지 못하고 점심식사를 한 후 바로 충남 예산군에 예약된 펜션에 도착하니 가족19명중에 17명 가족이 다 모였다.

지금 시간이 오후 5시경이다.

잠시 여장을 풀고 시간이 얼마 없으나 바로 옆에 있는 윤봉길의사 기념관으로 손자들과 9명이 답사를 하였다.

이곳은 201186~87백제문화가 살아 숨 쉬는 충남예산을 답사할 때 이곳을 찾은 곳으로 그러니까 12년 만에 다시 찾은 곳이다.

먼저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가려하니 벌써 문을 닫아 들어갈 수 없어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안내원이 시간이 530분이면 문을 닫아야 한다기에 대충 볼 수밖에 없었다.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으로 이곳은 국가지정문화재로써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어 있고 기념관내에는 윤봉길의사 유품인 보물 568-2, 568-3호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기념관 바로 옆에는 매헌 윤봉길의사의 어록 탑이 세워져 있으며 의사의 어록을 돌에 새겨두었다. 또한 도로 건너편에는 의사의 성장가인 저한당, 과 광현당, 농촌부흥 운동을 한 부흥원을 답사하고 우리들은 의사의 입상 동상 앞에서 사진을 남겼다.

 

윤봉길 의사는 1931(24)58일 김구선생을 만나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전달하고 1932(25) 420일 김구선생과 상하이의 의거 계획을 세워 429일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 천지를 뒤흔든 의거를 단행하여 일제 군부와 정계 주요인사 7명을 쓰러트렸다.

의사의 어록 중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사내대장부는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씀을 되새기면서 펜션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8시경에 펜션 정원에 넓은 평상이 있어 여기서 오늘 준비하여간 고기 식품 음료수를 마시면서 가족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자녀들이 준비한 케이크와 촛불을 켜고 부모 은혜감사노래, 지안(鋕侒)손녀 출생 축하, 은상(銀相) 손자 24주 생일축하 케이크를 자르면서 마침 오늘 저녁이 보름이라 둥근 달이 휘영청 밝아 모두를 축하해주는 밤이었다.

하루 밤을 펜션에서 보내고 아침 9시에 식사를 하고 정희와 나와 처는 어제 가보지 못했던 서산 해미읍성으로 갔다.

해미(海美)는 조선 초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로 말미암아 지리적 여건을 고려해 1407(태종7) 정해현(貞海懸)과 여미현(餘美懸)을 합쳐 부르게 된 지명이다.

지금의 해미읍성은 조선 전기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이다.

1417(태종17)부터 1421(세종3)사이에 축성되었으며 1652(효종3) 청주로 이전되기 까지 230년여 간 충청지역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다. 그리고 1914년 까지 호서좌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곳 서산해미읍성은 조선시대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동시에 천주교 박해의 아픔도 간직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성의 정문인 진남문(鎭南門)600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성 안쪽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데 1491(성종22)에 진남루가 중수(重修)되었음을 추정 할 수 있다.

성안으로 들어서니 조선시대의 병장기가 전시되어 있으며 그리고 300년 이상 추정되는 수령의 회화나무 기념물 172호가 그 당시 역사를 대변해준다.

1866(고종3)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해진다.

동헌(東軒)안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정무(政務)를 보던 중심건물인데

관찰사, 수령들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을 여기서 행해졌다.

그 외도 내아, 객사건물, 청허정, 등의 건물을 답사하고 다시 펜션으로 돌아 왔다.

 

11시에 오늘 마지막 문화재 국보 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답사하기 위해 가족 17명이 5대의 차량에 승차하여 출발하였다.

펜션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숲이 우거진 깊은 계곡위로 약300m 걸어가니 조그만 사찰이 있고 그 위에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다.

여래(如來)란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으로 부처의 10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마애여래삼존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최고의 작품으로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져 있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중앙에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보살입상 왼쪽은 반가사유상이다. 이곳 서산은 백제 사비도읍기(538~660)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의 중요 길목에 해당하는 곳이다.

 

여래입상은 눈을 크게 뜨고 미소를 짓고 있어 유쾌하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모양의 시무외인(중생의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 준다는 의미)과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내린 모양의 여원인(중생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을 표현하였다.

 

오른쪽 보살입상은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양손으로 보주(寶珠)를 들고 머리에는 연꽃을 새긴 보주형 광배를 하고 있다.

 

왼쪽 반가사유상은 왼쪽 다리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으며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전형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이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으며 머리에는 연꽃이 새겨진 보주형 광배가 있다.

보통 이 상은 석가가 태자였을 때 출가하기 전 고뇌하는 모습으로 태자사유상 이라고도 하며 이러한 번뇌하는 모습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으로 여겨진다.

우리가족은 이곳에서 함께 사진을 남겼다.

 

다시 내려와 이곳에서 각자 자기 집으로 잘 가라는 헤어지는 인사를 하려 하니 만나면 이별이라는 철칙을 실감하였다.

앞으로 몇 번 더 가족이 한곳에 모일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면서 서울로 부산으로 진주로 출발하였다. 나와 처는 큰딸 정희 차로 당진으로 대전~진주고속도로를 따라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무사히 귀가 하였다.

정희는 혼자 부산 집으로 잘 도착하였다.

5섯 가족에게 무사히 귀가하였는지 확인하고 편안히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