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07. 영봉산(靈鳳山)(395m)
오늘 毅庵(박형제). 雨堂(이충련). 準堂(유진희)선생 과 4명이 영봉산으로 가기위해 이반성면 용암리로 출발 하였다.
평소 선학산 정상에서 멀리 동남쪽으로 바라보면 다섯 봉우리가 차례로 물결이 굽이치는 형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시간이 나면 저산을 가야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진주향교 정기민 사무국장에게 물으니 일요일에 오면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오늘은 화요일이라 정수섭 씨에게 물었더니 친절히 안내 해주어 오늘 처음이지만 충의사(忠毅祠) 앞 느티나무 밑에 차를 주차하고 출발 하였다. 가다가 우측으로 하여 마지막에는 등산로 안내판을 보니 왼쪽으로 가리킨다.
등산로 안내판에는 1.3km로 표시되어 있어 이정도 거리는 우리 집에서 선학산 정상에 가는 거리와 같이 보여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육산으로 가기는 쉬웠으나 반쯤 오르면서 경사가 계속해서 급해져 그렇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산이다.
400여m를 앞두고는 경사가 아주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므로 로프를 설치해두어 로프를 의지해 올라갔다. 드디어 정상에 오르니 정상 표시석 과 주변 산을 소개해 두었다.
영봉산은 주변으로 만수산(萬壽山.456m), 보잠산(寶岑山 453m), 오봉산(五峰山 525m)등 훨씬 높은 산이 늘어섰으나 예로부터 영험하기로 이산을 최고로 쳤다.
산세가 장엄하고 정상에는 무지개 터가 있어 한해(旱害)가 극심할 때는 온 면민이 모여 기우제를 지냈다. 해맞이 및 달맞이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곳 정상에서 가져간 김밥과 간식을 먹고 조금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 남남정맥(1.6km)을 따라가느냐? 다시 왔던 용암마을(1.4km)로 가느냐? 의논 끝에 지금은 숲이 욱어져 등산로가 확실치 않아 왔던 길로 가기로 합의를 본 후 12시30분경에 하산하기 시작했다. 하산하면서 조심할 것은 천천히 그리고 나무계단 조심, 로프를 잘 의지하면서 평평한 곳 까지 내려와 다시 毅庵(박형제)이 가져온 솔 송주(松酒)를 한잔씩하고 용암마을로 하산하였다.
오늘 이 아름다운 영봉산을 산행하면서 마지막 하산 길에 해주정시 집안 묘역이 있기에 어떻게 조성했나 싶어 가봤더니 나의 친구 경상대 농화학과 1회 입학 정이근 박사 묘비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나는 친구에게 재배를 하였다. 참 무던한 친구인데 먼저 가신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박사로써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저세상에서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했다.
우리 일행은 오후 1시30분에 충의사 까지 도착하였다.
충의사(忠毅祠)는 몇 번 답사를 하였다. 雨堂(이충련)선생을 위해 들어 가려했으나 충의사(忠毅祠)에 대문이 열려 있을 줄 알았는데 대문이 잠겨 밖에서 사진만 남겼다.
문화재자료 제61호 충의사(忠毅祠)의 위치는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이다.
조선시대 명장 충의공 정문부(1565∼1624)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의공 정문부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선조 21년(1588)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 왜적과 싸워 승리하였다. 또한 선조 26년(1593) 백탑교 전투에서는 왜군을 크게 무찔러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기도 하였다.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전시관에는 장군과 관련된 유물과 사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경내에 가호서원이 있다. 남강댐 수몰 공사로 인하여 1995년 귀곡동에서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세워져 있다.
임진전쟁(1592년)시 의병장 충의공 농포 정문부(鄭文孚)선생을 비롯한 함경도 의병의 전공을 기록한 북관대첩비(1708년)가 러.일 전쟁 때 일본군이 강탈하여 가져가 설치한 후로 동경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2005년 10월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원래 비는 북한 함경도 길주로 복제비는 독립기념관에, 이곳 충의사에는 복제비와 국역비를 세웠다.
다시 용암사지부도가 있는 옛 절터로 이동하였다.
오늘 이곳을 찾은 것은 10여년이 지났다. 진주성 문화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이곳을 답사하였는데 그때는 앞에 축사도 있었고 문화재 관리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모니터링을 하여 문화재청에 건의도 하였다. 이번에 가보니 많이 정화되었으며 관리인이 있어 이제는 새로운 모습으로 잘 보존되고 있다.
보물 제372호 진주 용암사지 승탑 (晉州 龍巖寺址 僧塔)의 위치는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산31번지 이다.
원래는 용암사 터의 서북쪽에 있던 탑으로, 파손되었던 것을 1962년에 원래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바닥돌, 기단(基壇)의 가운데 부분, 탑신(塔身) 등이 파손되어 이 부분들을 새로 만들어 놓았다. 특히 기단의 가운데 돌에는 구름과 용이 조각되어 있었으나 새로 보충된 것에는 간략하게 모서리기둥만 새겨 아쉬움을 주고 있다.
기단은 아랫돌 각 면에 구름무늬를 깊게 새기고 그 안에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天部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는데 그 수법이 우수하다. 연꽃무늬를 새긴 기단의 끝부분을 지나 탑신의 지붕으로 올라가면 얇은 지붕돌 밑에 똑같은 테두리의 평평한 받침이 눈에 띈다. 지붕선의 끝은 추녀선과 만나는 곳에서 돌출된 꽃장식을 만들고 있다. 경사면은 완만하고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얇은 띠로 둘러져 있다. 머리장식부분은 석탑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구조물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누구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비례가 잘 맞고 모든 부재가 8각으로 조성되어 기본형을 따르고 있다. 사리탑 주위에는 석불, 석등, 석탑의 부재가 함께 터를 지키고 있다.
바로 위편에는 시도유형문화재 제4호 용암사지석불 (龍巖寺址石佛) 이 있다.
위치는 경상남도 진주시 용암길46번길 44 이다.
수성암의 절벽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용암사 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불상으로,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은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이목구비가 단정한 타원형의 얼굴은 오른쪽 뺨이 깨졌으나 눈가에 어린 미소가 불성(佛性)을 충분히 느끼게 할 만큼 온화하다.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는데, 옷깃은 두꺼우며, 옷 주름은 선으로 처리하여 신체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양식으로 두건 쓴 모습과 더불어 당시의 지장보살상의 실례로 주목되고 있다.
무릎은 비교적 넓고 높직하며, 무릎 위에 두 팔 굽을 짚고 두 손을 맞잡았는데,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고 있어서 상체가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옷 속에 드러난 신체는 부푼 느낌이 들지만 탄력이나 양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2016년 7월8일자 전 경남도의회 진종삼 의장의 경남일보에 특별기고한 『용암사 터와 문화재 관리』 라는 내용을 보면 용암사는 고려제찰사 박전지(朴全之: 1250~1325)가 찬한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에 따르면 도선 국사는 만일 삼암사(三巖寺)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쳐져 일국이 되고 자연히 전쟁이 종식되리라 해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직접 비보사찰 삼암사를 창건했다.
지금의 순천 조계산 선암사(仙巖寺), 광양 백계산 운암사(雲巖寺), 진양 영봉산 용암사(龍巖寺)가 그것이다. 창건 된지 1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선암사, 운암사는 아직도 절이 번창하고 있지만 절집이 100여 칸이나 됐고 대장경 인영본 600여 상자를 봉안했으며, 충숙왕이 천태종 무외국통(無畏國統)의 하산소(下山所)로 지정해 한때 웅장하고 화려했던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사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발굴하지도 않은 채 일부 문화재만 암자 터에 흩어져 있고, 사역(寺域)은 마을과 밭으로 변해 있다. 이는 마치 솥의 발이 하나 부러진 듯 도선 국사의 삼암사 비보설이 크게 훼손됐다고 볼 수 있으며 혹시 용암사의 폐사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고 한반도에 계속해 전운이 감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기고한 것을 보면 삼암사의 창건 취지를 이해가 된다.
이 절터들은 임진왜란 시 북관대첩(北關大捷)으로 유명한 정문부(鄭文孚1565~1624) 장군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면서 해주 정씨 문중 소유가 되었으며 암자 터에는 장덕재(藏德齋)라는 재실까지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농포집 장판각(農圃集 藏版閣)주춧돌을 보니 석탑의 옥개석을 거꾸로 해서 밭쳐 두고 있다.
이렇게 된 연유는 아마도 조선시대는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으로 인하여 불교를 배척(排斥)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웅장하고 거대한 사찰이 어떻게 일시에 소멸 되었을까?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데없음이 현실로 나타났으니 세월이 허무하다고 할까? 역사는 이렇게 변천하는가 보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한마을에 이렇게 문화재도 세 곳이나 있어 답사를 마치고 산행도 무리 없이 잘 마쳤다.
돌아오는 길에 雨堂(이충련)께서 이곳은 내가 사는 지역이니 식사를 하고 가자고 권해서 가보니 정말 맛있고 특미인 월산 닭무국 식당(754-3324. 010-7159-0503)에서 식사를 하고 우당 집 앞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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