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7.진주지역 독립운동사 답사기(길위의 인문학)
이번 강좌는 진주교육대학 송희복 교수이다. 3회 강좌를 마치고 오늘은 현장 답사를 하는 날이다.
아침 8시50분 까지 서부도서관 앞 도로에서 26명이 집결하여 9시에 진주교회에 도착하였다.
1919년 3월18일 진주지역의 독립운동 시발점이 된 진주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던 현장이다.
그 당시 진주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리자 진주 촉석루 등 5곳에서 동시에“만세”를 외쳤다.
고종 장례를 참석하기위해 상경한 인사들이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한 뒤 진주로 돌아오면서 서울을 찾았던 김재화, 심두섭, 조응래, 박대업 등은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진주로 몰래 반입하여 집현면 하촌리 김재화 집에서 여러 차례 비밀회합을 갖고 거사 계획을 하였다.
진주 장날인 3월18일 정오가 되자 진주교회의 종각에서 우렁차게 울리기 시작하자 이를 신호로 중앙시장, 촉석루입구, 재판소 앞, 봉곡동, 칠암동 강변 등 5곳에서 만세시위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시발점인 진주교회 종탑을 오늘 찾았다. 지금 이 종은 그 당시의 종이 아니라고 한다.
그 종은 어느 감리교 교회에서 보관하고 있다는데 하루속히 이곳으로 원래 자리에 보존 되었으면 좋겠다. 진주교회 종탑이 있는 건물 벽에 다음과 같이 글이 새겨져 있다.
『3.1운동 기념종탑』
「1919년 3월18일 장날에 처음 있었던 진주 기미독립만세 의거는 진주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진주지역 5곳에서 일제히 시작되었으며 당일 일제에 의해 종이 강제 철거되었다. 이 사실을 기념하기위하여 종탑을 복원 한다. 2012년 3월1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진주교회」
다른 표지판에는 『진주에서 최초로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함께 예배 본 교회』란 제목으로
「호주 선교사가 1905년에 설립한 진주교회 초창기에는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따로 예배를 보았다. 그러다가 1909년에 부임한 라이엘 D.M.Lyall목사가 “하느님 앞에는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다”며 함께 예배 보기를 권하니 그해 5월9일에 15명의 남녀 백정신도들이 일반인들의 예배에 참석하였다. 이에 반발한 일반인들이 백정과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하며 교회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스콜스 와 켈리 두 선교사의 설득으로 결국 화해하여 그해 8월1일부터 함께 모여 예배를 보게 되었는데 이는 신분 차별을 없애는데 앞장선 역사적인 일이었다.
2013년 4.25
형평운동 90주년을 맞이하여 진주교회와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이 표지판을 세웠다. 」
진주 교회 종탑을 뒤로 하고 사천시 곤양면 다솔사로 이동하였다.
다솔사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도보로 500여m 되는 삼나무, 소나무,
편백 숲 사이로 만들어 놓은 데크로드와 힐링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대양루(大陽樓) 앞에 다다른다. 마침 사천시 배시남 해설사가 계셔서 해설을 부탁했더니 쾌히 승낙 하시면서 친절히 다솔사의 역사를 상세히 설명해준다.
다솔사는 경남에서 제일먼저 설립된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511년(지증왕 12)에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영악사(靈嶽寺)라 하여 처음 세웠고, 636년(선덕여왕 5) 새로 건물 2동을 지은 뒤 다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676년(문무왕 16) 대사 의상(義湘)에 의해 영봉사(靈鳳寺)로 바뀐 뒤 신라 말기에 국사 도선(道詵)이 다시 손질하여 고쳐 짓고 다솔사라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한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전화로 불탔으나 숙종 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의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듬해 다시 세운 것이다.
절 안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 적멸보궁, 나한전, 천왕전(天王殿), 요사 채를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에 세워져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2층 맞배집으로 건평이 106평에 이르는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또한 대웅전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되어 대웅전을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사리탑은 뒤편에 있고 적멸보궁 안에는 臥佛이 있다.
특히 이 사찰은 일제강점기에 한용운(韓龍雲)선생이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한동안 머물러 《등신불》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때 주지스님은 효당 최범술 씨이다. 최범술(崔凡述, 1904년 5월26일 사천서포~1979년 7월10일)은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이고, 불교 승려이며, 제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적멸보궁 옆 안심료(安心寮) 앞에 황금공작편백 나무가 3그루 있는데 이나무는 만해 한용운선생의 60회 회갑기념으로 심었다고 하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표시판이 있다.
『卍黨(만당)근거지-다솔사』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결성된 불교계 항일비밀결사 만당의 근거지이다.
불교계 청년들은 1930년 5월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호국 불교의 전통을 잇고, 한국 불교의 자주화와 대중화를 위해 만당(卍黨)을 조직하였다. 만당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만당 주도자들은 일제의 식민 불교 정책에 대항하면서 다솔사를 근거지로 불교혁신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라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다솔사 뒤편에 있는 차밭을 한 바퀴 돌면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찰 정경이 정말 아름답다. 지리산 끝자락인 봉명산(408m)에서 내려오는 맥의 혈이 맺힌 다솔사가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싸여 천혜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면 다솔사 아래 어금혈 봉표(禦禁穴封表)가 있다.
다솔사터가 명당으로 알려지자 세도가들이 사사로이 묘를 쓰려고 하자 스님들이 상소를 올려 임금이 어명으로 다솔사 도량에 혈(穴.묏자리)를 禁하게한 표석이다. 1890년(고종 광무25년)에 어명을 받들어 경상도 진주관아 곤양읍성에서 세웠다는 표석이 있다.
해설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다솔사에서 6km지점에 있는 원전 삼거리 근처에 강명학원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강명학원은 김동리 선생께서 다솔사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면서 농촌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는데 원전주재소 일본경찰이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고 한글을 가르친다고 하여 김동리 선생을 주재소에 가두고 강명학원을 폐쇄 하였다고 하는데 강명학원이 이곳 원전 삼거리라고 하나 어딘지는 알 수가 없어 그냥 지나치며 상상만 하면서 완사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산청군 단성면 만세운동 장소인 단 성현이 있었던 지금의 단성초등학교 와 단성장터로 이동하였다. 단성현은 현재 단성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며 이곳 흔적은 주춧돌만 운동장 가쪽 히말리아시다 나무 둘레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 로이며 단성현청을 지나간 표시판이 있다. 단성현 앞이 단성장이므로 이곳에서 단성 사람들이 1919년 3월20일~21일 만세 운동을 하였다.
다시 오늘 마지막 답사지인 중재 김황선생의 생가와 선생을 모신 도량서원과 묘소로 이동하였다.
신등면 단계장터에도 1919년 3월19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중재 김황(金榥.1896~1978)선생은 의령에서 태어나 자랐다. 도산서원 원장을 지낸 김극영의 아들로 아버지가 경술국치를 당해 세상과 등질 요량으로 가족을 이끌고 산청군의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그는 면우 곽종석의 문하인으로 성장하였다 스승의 명에 따라 3.1운동 때 서울에 가서 상황을 살피고 돌아와 『기미일기』라는 기록물을 남겼다.
중재(重齋) 김황선생(金榥 先生)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경남 산청군 신등면 상법마을로 들어와 한학을 공부하였고 17세 때 거창으로 가서 면우 곽종석 선생의 문하로 수학하였다.
1919년 24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가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여 삼일만세의거를 보았다.
이후 거창으로 내려와 면우곽종석 선생의 명을 받아 파리장서 서명운동을 유림들로 부터 받는 작업을 하였고,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떠난 후 일이 발각되어 제1차 유림단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1926년 상해 망명 중이던 김창숙에게 유림들로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을 주었고 이 자금이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폭에 사용된 것이 밝혀져 제2차 유림단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른 후 1928년 경남산청군 신등면 내당으로 이사를 하였고 이후 50여 년 동안 수많은 제자를 길러 내어 조선조 유학시대와 현대교육시대의 변환 점에 연결고리 역할을 한 큰 스승이었다.
金榥 선생은 1978년 11월15일 83세에 돌아 가셨는데 참석한 유림이 3,000여명, 제자로 복을 입은 사람이 300여명, 만사와 제문이 700여 편이 넘었다고 하는 근래에 마지막 유교 장을 치르신 분이다.
차가 귀하던 시절 신등면사무소가 있는 단계에서 내당리 자택까지 10리길이 막혔다고 한다.
오늘 중재선생이 마지막 거처했던 물산마을에 도착하였다. 지금은 주인 없는 쓸쓸한 초가집 희고당(僖告堂) 과 내당서사(內塘書舍) 서당이 잡초가 무성한 뜰 안에 새로운 단장을 기다리고 있다. 산청군에서는 중재선생의 생가를 보수하여 잘 보존해야겠다.
다시 도당서원과 묘소를 찾았다.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 전국 유림들이 이곳에 도양서원을 세우고 신위를 모신서당이다. 신위는 『重齋金先生』라 쓰여 있고 오른편에는 선생의 생전 영정이 모셔져 있다.
묘소는 도양서원(道陽書院) 뒤편에 있으며 『重齋先生義城金公之墓 配孺人宜寧南氏 附左』 표석이 세워져 있다.
오늘 「길 위의 인문학 강좌 답사」를 통해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 우리 선조들의 애국정신과 자주독립을 위해 거국적 독립운동을 깊이 새겨 다시 한번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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