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19.10.24. 진주성 지킴이교육

雲山- 2019. 10. 24. 22:00

‘19.10.24. 진주성 지킴이교육

 

  930분 문화원 앞 주차장에서 진주성지킴이 30명이 탑승하였다.

유임규 사무국장께서 인원 점검을 하고 오늘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이어 김경자 회장의 인사말을 하면서 우리진주지역의 소외된 문화재를 발굴하고 찾는데 역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진주성 지킴이가 앞으로의 계획은 청소년 문화유산 교육 강화, 사회봉사(남강유등축제), 논개제 헌 다례 봉사 등 세 분야를 앞장서 실천하려고 한다.

이어 운행 중에 박경묵 부회장이 진주지역 향교와 서원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벌써 경상남도 문화재료 제 14 호인 동산재에 도착하였다.

 



진주 동산재 (東山齋) 는 경남 진주시 대평면 신풍리 에 있다. 남강댐 수몰로 인해 이곳 경치좋고 남강댐을 내려다보이는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창원 황 씨 문중에서 세운 것으로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여기에는 황석기· 황상· 황준· 황윤의· 황우· 황여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10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황석기(?∼1364)는 고려 말의 문신으로 1342년 조적(曹賊)의 무리를 제거하고 왕을 모신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문장에도 뛰어난 분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1358년에는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에 이르기도 하였다.

황상은 고려 말의 무신으로 충혜왕 때 호군이 되었고 공민왕 때 밀직부사가 되었다. 그 뒤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는데 무예에 능하고 용맹이 뛰어났다.

동산재는 원래 신풍리 939번지에 있던 것을 남강댐 공사로 1995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마침 문중에서 나와 문을 열어주고 친절히 안내를 해주신다.

이곳에서 단체 사진을 남기고 문화재자료 제13호 고산 정으로 이동하였다.

고산 정에 도착하니 정옥영 후손이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산정 (孤山亭) 은 경남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산131 이다.

정옥영 씨는 포은 정몽주선생의 후손으로 고산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고산정은 징사 학포 정훤(鄭喧)이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학포(學圃)는 조선 선조 16년 무자년 합천에서 출생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광해군의 폭정에 휩쓸리기 싫어 합천에서 대평으로 옮겨와 이곳에서 정자를 지어 고산정(孤山亭)이라 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인조 때 조정에서 조봉대부 영산현감으로 천거하였으나 고사하고 이곳에서 학포정사(學圃精舍)라 하여 이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고산정은 대평의 고산에 위치하였으나 진양호의 수위상승으로 왕래가 어려워 2006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다음은 국가사적 108호 단성 목화시배지로 이동하였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山淸 木棉始培 遺址)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목화로 887 (사월리)

이다.

 

이곳은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공민왕 12(1363) 문익점은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밭을 지키던 노인이 말리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씨앗을 붓통에 넣어가지고 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 퍼지게 하였다.

 

문익점이 태어난 곳인 배양마을은 지금까지도 목화재배의 역사를 간직해오고 있으며,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가 오른쪽에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싼 백여 평의 밭이 있다. 밭 옆에는 기와지붕을 한 비각 안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지라는 제목의 비석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옛터에 밭을 일구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오늘 마침 산청군 해설사가 우리들을 잘 안내해주었다.

부민각(富民閣)앞 광장에는 제13회 산청목화축제(2019.10.26.~)를 준비 중이다.

슬로건은붓두껍 속에서 피어난 사랑!이란 글을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전통 무명 베 짜기 재현도 실시한다고 한다.

 

부민각 옆에는 문화재자료 제52호인 삼우당효자비 (三憂堂孝子碑) 가 있다.

문익점 선생이 살았던 마을에 서 있는 비로, 선생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삼우당 문익점(13291398)은 고려시대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이 돌아가시자 묘 곁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 당시는 왜적의 침입이 잦아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노략질이 심하여 모두 피난을 가고 있었는데, 그 만이 홀로 평상시와 같이 곡을 하고 있었다. 왜적도 그의 이러한 효성에 감동하여 나무를 다듬어 효자를 해치지 말라라고 써서 세워 놓도록 하니, 그 때부터 이 지역이 평안하였다 한다. 그 후 조정에서는 고려 우왕 9(1383) 그에게 표창을 내리면서, 마을을 효자리라 이름 하도록 하였다.

비각 안에 모셔둔 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운 모습으로, 비 몸의 윗변은 살짝 둥글게 다듬었다.

시배지 기념관을 둘러보고 야외에서 준비한 뷔페식 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였다. 다음 코스는 문익점 선생을 모신 유형문화제 제 237호인 도천서원으로 이동하였다.









 

도천서원 신안사재 (道川書院新安思齋)는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 리이다.

문익점(13291398)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나라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선생은 고려 때의 문신이며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서원은 조선 세조 7(1461)에 세웠으며, 조선 정조 11(1787)도천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았다. 고종 8(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75년에 사당인 삼우 사를 짓고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서원 내의 신안사재는 조선 명종 6(1551)에 지은 것이며, 현재 건물은 조선 순조 4(1804)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오늘 마지막 답사 코스는 남사 예담 촌으로 이동하였다. 남사 예담촌은 지리산으로 갈 때 올 때 자주 지나쳤지만 오늘은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설명을 잘 해주신다.

예담촌은 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을 제1호이다.

제일먼저 찾은 곳은 문화재 자료 제 117호인 촤준석 고택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산청남사리최씨고가 (山淸南沙里崔氏古家) 의 소재지는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285번지이다.

남사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집으로 안채와 외양간채, 사랑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으며 1930년대 지은 집이다.

남녀 사용공간을 나누어 공간의 독립성을 부여한 뛰어난 배치로 사대부가의 유교적 전통을 엿볼 수 있는 집이다.

 

다음은 부부회화나무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선비나무로 불리는 두 그로의 화화나무가 서로에게 빛을 더 잘 들게 하려고 몸을 구부려서 자랐고 부부가 나무 아래로 통과하면 금실 좋게 백년해로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부부나무로 불린다.

 

다음은 문화재 자료 118호인 이씨 고가로 이동하였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8호 산청남사리이씨고가 (山淸南沙里李氏古家) 는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대로2883번길 16 (남사리) 이다.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1700년대 건축이다. 남북으로 긴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외양간 채와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씨 고가의 고택 안에 있는 회화나무는 450여년 수령으로 나무에 파인 혈()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빌면 애기를 낳게 해 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다시 이제 개국공신 비석과 국보302호로 승격한 안내 표시판이 있다.

다시 하 씨 고가의 감나무를 답사 하였다. 수령은 620년이며 고려 말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의 손자 하연(河演)이 어릴 때 어머니에게 홍시를 드리기 위해 심은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이다. 토종 반시 감으로 산청 곶감의 원종이기도 하며 현재에도 감이 열리고 있다.

여기서 감나무 밭을 지나면 원정매(元正梅)가 있다.

수령은 670년이며 진양 하씨 집안의 매화나무이며 산청 삼매중(원정 매, 남명 매. 정당 매) 하나로 원정 매로 불린다. 河楫이 심은 것으로 원정 매라는 이름은 그의 시호가 원정이었던 데서 비롯하였다. 홍매화로 원목은 2007년에 고사하고 뿌리에서 자라고 있다.

그 옆에 표지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元正公 詠 梅詩

舍北曾栽獨樹梅(집 양지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臘天芳艶爲吾開(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였네)

明窓讀易焚香座(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다)

未有塵埃一點來(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어라)

 

다시 돌아 나와 문화재료 453호인 사양정사(泗陽精舍)로 이동하였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3호 사양정사 (山淸 南沙里 泗陽精舍)는 산청군 지리산대로 2901-7 이다.

사양정사는 1920년대에 상량한 건물로 근대 한옥의 건축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유학자 계제 정제용(1865~1907)의 아들 정덕영과 장손 정정화가 남사로 이전한 후 선친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재실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7,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이며, 기둥의 형태는 외진주가 원기둥이고 내진주는 네모난 기둥이다. 양쪽 끝으로는 각각 1칸의 마루가 있으며, 계자난간을 두었다. 두 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방이 오른편에 2, 왼편에 1칸이 있다.

예담 촌에 더 많은 문화재를 볼 수 있지만 사양정사를 끝으로 진주로 돌아오면서 강신웅 교수께서 진주성 촉석루 편액 중 敬齋 河演 시와 憂堂 朴融의 시시를 유모스럽게 쉽게 풀이하여주었다



오늘 진주시 주변의 많은 문화재를 답사하고 해설을 듣고 문화재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우리 진주성 문화재 지킴이회원은 계속해서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모니터링 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