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22.3.20. 모한재(慕寒齋), 이순신장군 백의 종군길 답사

雲山- 2022. 3. 21. 11:31

‘22.3.20. 모한재(慕寒齋), 이순신장군 백의 종군길 답사

 

아침에 남강 변을 자전거로 일주하고 의암 집 옆에서 연락하니 마침 집에 있어 준당과 함께 옥종 모한재를 답사하자고 하였다. 서동은 몸이 불편하여 가지 못하고 셋이서 12시경 출발하여 완사에 가기 전 삼거리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수곡을 지나 옥종면을 통과 안계리로 가는 도로 폭이 쫍아 불편했으나 들어가니 노송과 오래된 은행나무 보호수(수령400여년)가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입구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등록된 표시판이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하동 모한재 (河東 慕寒齋)

경남 하동군 옥종면 안계길 67-63 (안계리)이며 이곳은 겸재 하홍도(河弘度)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 중기 학자인 하홍도(15931666)는 성균관 유생으로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저서로는 겸재집이 있다.

 

모한재(慕寒齋)는 선생이 도학을 연구하고 학문을 강의하던 곳으로 모한(慕寒)이라는 이름은 주자가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을 수양하던 한천정사를 사모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홍도의 위패는 본래 종천서원(宗川書院)에서 모시고 있었으나 서원이 철폐되면서 위패와 함께 종천서원의 현판을 모한재로 옮겨 왔다. 당대의 현인인 미수 허목, 약천 남구만 등이 지내기도 한 곳이다. 여기에는 미수 선생의 친필을 보관하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10일에는 영남 유림들이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모한재(慕寒齋) 도광문(道光文)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菊軒 處士 晉陽河公 事跡碑가 있다.

강당 안에는 미수 허목 선생의 친필인 모한재 현판이 중앙에 걸려있고 옆에는 종천서원(宗川書院)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특이한 현판이 있는데 남계서원에서 보았지만 이곳에도 역대 왕(태조~ 정종)의 국기(國忌) 일자를 기록해두고 있다.

사당 안에는 하천룡 후손에 의하면 영정과 위패를 모셔두고 있다고 하는데 문이 잠겨 답사하지 못하였다. 모한재를 뒤로하고 내려오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모한재 앞에 수백 년이 넘는 수령의 노송이 있고 그 가운데 높이 쌓은 단이 있어 이상이 여겨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계곡 쪽으로 바위에 글이 새겨 있는데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어 류진희 박사께서 아마 영귀대(詠歸臺) 글자인 것 같다고 하면서 이곳은 선비들이 모한재에는 공부를 하는 곳이고 이곳은 휴식 공간일 것이라 설명한다. 서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휴식을 하면서 시를 읊는 곳으로 아마 서원 앞의 풍화루 같은 역할일 것 같다.

계곡을 빠져나와 안계 마을을 지나 수곡 방향으로 가다보니 하동 옥종면 문암마을 과 진주시수곡 원계마을로 연결되는 교각이 있어 잠시 강정(江亭)에 차를 세웠다.

 

 

이곳은 이순신장군께서 백의종군 길로 이순신장군이 묵었던 옥종 문암 이희만 집, 이홍운 집을 거쳐 이곳 강정을 지난 곳이다. 십여 년 전 학생들을 인솔하여 이곳에 왔던 기억이 난다. 이순신 장군 종군 당시는 나루터 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이순신장군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 하다가 정유년(1957) 716일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합천 율곡을 떠나 전황을 살피기 위해 오가며 잠시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합천율곡을 떠난 지 이틀 뒤인 720일 이희만의 집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진주 목사와 만나 대책을 숙의 하였다. 또 노량과 곤양의 전황을 살핀 뒤 이홍훈의 집에 머물다 726일 이곳 정개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종사관 황여일 과 진주목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루터는 1975년 까지 370여 년 동안 원계리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강정을 뒤로하고 교각을 건너 나오니 바로 이순신장군이 727~83(7)간 묵은 손경례 집이 있는 원계리 이다.

 

이곳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킨 이충무공 진 배미 유지가 있다.

83일 이른 아침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서 교서(敎書) 유서(遺書)를 가져 왔는데 삼도수군통제사의 명령이었다.

조선의 수군이 전멸하였음에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상소를 올리고 울돌목의 물살과 지형을 이용해 300여척이 넘는 왜군의 수군을 물리친 명랑대첩을 있게 하고 본국으로 퇴각하는 왜군을 끝까지 막고 싸워 승리를 이끌면서 전쟁이 위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 我死)라고 했던 노량해전을 있게 한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역사적으로 오래된 모한재(慕寒齋) 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길을 답사하므로 역사와 문화재는 현재를 반성하는 좋은 충효교육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