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22.07.10. 안의삼동(安義三洞) 명승지를 찾아

雲山- 2022. 7. 13. 11:40

‘22.07.10. 안의삼동(安義三洞) 명승지를 찾아

雨堂(李忠鍊). 毅菴(朴亨濟) 과 함께 안의 삼동 명승지를 답사하고자 진주에서 10시경에 출발하였다.

먼저 심원계곡 끝자락에 위치한 시원한 용추 폭포를 찾았다. 용추폭포 옆에 차를 주차하고 먼저 용추사를 답사 하였다. 사찰내를 답사하고 대웅전에 들려 부처님께 삼배하고 다시 용추폭포로 내려갔다.

명승지인 함양 심진동 용추폭포 (咸陽 尋眞洞 龍湫瀑布)

우리나라 동천구곡의 대표격인 안의삼동(安義三洞)의 하나인 심진동을 대표하는 경관으로, 심진동 상류에 있는 용추폭포를 유람하면 안의삼동의 명승유람이 끝이 난다는 말이 있으며, ‘용추폭포라는 이름의 수많은 폭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명소이다.

용추폭포는 높이 약 15m, 호소의 직경이 약 25m로 상류에 형성된 좁은 골짜기를 따라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의 울창한 삼림과 암반 위를 흐르는 맑은 계류, 용추에서 떨어지는 우레와 같은 폭포수, 그 아래의 깊은 연못 등이 어우러진 명승지이다.

 

안의삼동(安義三洞)은 옛날 안의현에 있는 세 곳[(화림동(花林洞), 원학동(猿鶴洞), 심진동(尋眞洞)]의 빼어난 절경을 간직한 곳을 의미하며,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이라 한다.

그런데 전국의 명승지인 이곳에 몰지각한 사람들이 수영을 하는 것을 보니 명승지의 관리가 너무 소홀하다. 함양군 문화관광과 에서는 안내문을 써 이곳에서는 수영을 금지시켜야 한다.

 

용추 폭포에서 조금 내려오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함양 용추사 일주문이 외로이 서있어 옛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이곳 위치는 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이다.

덕유산에 있는 용추사는 원래 신라 소지왕 9(487) 각연대사가 지은 장수사에 속해있던 암자이다. 장수사는 한국전쟁 때 불타 버리고 문만 남아 있다가 1975년에 복원되었다.

용추사 일주문은 2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지탱하는 건물이며, 조선 숙종 28(1702) 호남사혜가 세웠다고 한다.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갈 때 제일 먼저 통과하는 문으로,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이다.

현판은 남쪽으로 향한 정면에만 있는데,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德裕山長水寺曹溪門)’이라 새겨져 있다.

다시 내려오면 연암(燕巖) 물레방아공원이 있다.

물레방아는 1780년 사신의 일행으로 중국(당시 청나라)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1737~1805)선생이 중국의 사상과 문물에 관해 쓴 열하일기를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하였다. 1792년 함양군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재임 하면서 농기구( 베틀, 인력양수기, 물레방아)를 만들어 실용화 되었다.

함양 산천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돌고 우리 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도네라는 민요가락처럼 함양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군민의 의지를 담아 당대의 문필가요 농경문화 변혁의 선구자였다.

물레방아로 평화롭고 넉넉한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제민(經世濟民),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요약 할 수 있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을 이루었다.

 

조금 더 내려오면 기백산 군림공원 입구 건물 아래 옆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함양 심원정(尋源亭)이 있다. 위치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하원리 1353이다.

1558년 돈암 정지영이 현 위치보다 조금 상류인 용추폭포 부근에 초가로 건립하였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고 1770년에 후손들이 중수하였으나 풍수해로 훼철되었다. 18457세손 정복운 등이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였으며 1948년에 중수가 있었다.

심원정은 용추계곡 입구의 매표소 바로 우측을 흐르는 지우천 계곡의 제 1담소인 청심담의 거북바위위에 건립되었으며 심진동 초입에 세운 정자이다. 옛 안의에는 삼가승경(三佳勝景)인 심진동 심원정, 원학동 수승대, 화림동 농월정을 삼가승경(三佳勝景)으로 불렀다.

 

심진동을 나와 점심 식사를 하기위해 안의읍 시장 안에 있는 쇠고기국밥 원조집을 찾아 식사를 하고 광풍루로 이동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함양 안의 광풍루 위치는 경남 함양군 안의면 강변로 303 (금천리) 안의면 진입로의 금호강변에 우뚝 서있는 2층 누각이다.

조선 태종 12(1412)에 처음 짓고 선화루라 이름 지었던 것을 세종 7(1425)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다. 그 후 성종 25(1494)에 정여창이 다시 짓고 광풍루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탄 것을 선조 34(1601)에 복원하였고, 숙종 9(1683)에 다시 지었다. 오랜 세월동안 많이 퇴락한 것을 1980년에 정비하였다.

광풍루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을 간직하고 있는 우람한 건물이다. 이층에는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 두었다.

 

다시 화림동천으로 이동하면서 제일 위쪽에 있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함양거연정에 도착하였다.

오늘 거연정을 답사 도중 먼저 화림재에 들렸다. 마침 후손이 화림재에서 앞뒤 문을 열고 계곡바람이 통하는 마루에 앉아 있어 인사를 나누고 거연정과 화림재에 관한 역사를 들었다, 친절하게도 안내를 하면서 문집도 받았다.

이곳은 역시 명승지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위치는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 (咸陽 花林洞 居然亭 一圓)으로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877 번지이다.

거연정(居然亭(경남 유형문화재)은 조선중기 화림재 전시서(全時敍)가 이곳에 은거하여 지내면서 억새로 만든 정자를 그의 7대손인 전재학 등이 1872년 재건한 것으로, 거연(居然)은 주자의 시 정사잡영(精舍雜詠)12수 중에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딴 것으로 물 과 돌이 어울린 자연에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거연정은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이 주변의 기묘한 모양의 화강암 반석, 흐르는 계곡 물 등과 조화를 이루는 등 동천경관을 대표할 만한 명승지이다.

임헌회(任憲晦1811-1876)영남의 명승 중에서 안의삼동(安義三洞)이 가장 빼어나고, 그 중에서도 화림동(花林洞)이 최고이고, 화림동의 명승 중에서 거연정(居然亭)이 단연 으뜸이라고 거연정 기문에 적고 있다.

 

거연정 바로 아래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함양 군자정이 있다. 위치는 경상남도 함양군 육십령로 2590 (서하면)이다. 군자정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80호이며 서하면 봉전마을은 정여창 선생의 처가가 있는 마을로서 선생이 처가에 들러 유할 때는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에서 유영하였다.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 공의 5대손인 전세걸이 일두 정여창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으로 칭하였다.

군자정 역시 천연의 암반위에 단동으로 세운 중층 누각건물로서, 내부에는 방을 들이지 않고 모두 틔워 놓았다.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함양 동호정(東湖亭)이 나온다. 위치는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842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가 있었다.

 

동호정은 함양군 안의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전주방향으로 7km 정도의 거리에 국도와 연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동호정은 남강천 담소중의 하나인 옥녀담에 있으며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강 가운데에는 노래 부르는 장소(영가대), 악기를 연주하는 곳(금적암), 술을 마시며 즐기던 곳(차일암)을 포함하며, 차일암이라고 불리는 수백평의 널찍한 암반이 있어 이 곳이 풍류를 즐기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내려가면 농월정(弄月亭)이 있다. 이곳은 많은 관광객들이 휴양하는 곳으로 넓은 바위와 덕유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물이 너무나 유람하기에 좋은 곳으로 전국에서 모여드는 곳이다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인 함양 안의면 성북마을 출신인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榑1571~1639)공께서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가 파직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 생활을 하면서 방대한 너럭바위와 주변 경관의 수려한 이곳에 서당을 짓고 심신을 수련하였으며 인종 반정 후 예조참판과 강릉도호 부사 등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왕이 불러도 벼슬길에 나가지를 않았다.

1637년 농월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쉬던 곳으로 몇 차례 중수하였다.

189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으며 정자 앞 암반에 지족당(知足堂) 장구지소(杖屨之所) 라는 글자를 후손들이 새겨 놓았다. 달밝은 고요한 밤에 암반위의 냇물에 비친 달빛은 한 잔의 술로 달을 희롱한다는 선비들의 풍류와 멋을 함축하고 있다.

 

농월정 맞은편 조금 아래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함양 종담서당 (咸陽 鍾潭書堂)이 있다.

대문이 잠겨 있어 들어 갈수 없지만 앞 표지판에 새겨져 있는데 위치는 함양군 농월정길 9-5 (안의면)이다.

종담서당은(鍾潭書堂)은 지족당 박명부가 후학을 양성했던 강학소이다.

안의삼동 중 원학동은 다음에 답사하기로 하고 오늘은 심원동, 화림동 답사를 끝으로

진주로 돌아오면서 몇일 전 에 준공한 산청군 환아정(換鵝亭)을 찾았다.

T-map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가니 산청읍에서 강변에 가장 높은 위치에 옛 모습 그대로 웅장한 루가 세워졌다.

620여 년 전 산청지역 선비문화의 상징이었던 환아정을 다시 복원시켰다.

46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산청군 청사 뒤편 산청공원 정상에 약 3500규모의 부지에 지어졌는데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웅석봉, 필봉, 왕산이 지척에서 보인다.

자 형으로 기동은 36개로 이층 누각이다.

중건기를 보니 성균관 유도회 고문이신 沈東燮 씨가 지었으며 글씨는 정현복의 아들鄭道準 서예가가 썼다. 정문에는 사의문(思義門) 현판이, 루 이층 건물에는 換鵝亭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모두 정도준 씨가 썼다.

오늘 안의 삼동 명승지(용추폭포, 거연정)와 선비들이 시문을 논하던 정자를 답사하고

여름 더운 날씨에도 문화재를 좋아하는 세분이 진주로 귀가하면서 이현동 하연옥 냉면으로 땀을 시키면서 저녁식사를 하고 무사히 답사를 마무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