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23.04.8~9. 광주 광역시. 나주시. 장성군 문화유산 답사기

雲山- 2023. 4. 10. 12:01

‘23.04.8~9. 광주 광역시. 나주시. 장성군 문화유산 답사기

 몇 년 전부터 전라 남, 북도를 답사하면서도 광주 민주화 묘지를 답사하지 못해 언젠가 시간이 나면 답사를 가자고 雨堂(李忠鍊)에게 말한 적이 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우리 넷이서(雨堂, 毅菴, 內憲, 雲山) 교육계 퇴임기념으로 다시 가자고 하였다.

毅菴이 사모님 병간호를 위해 서울에 가셔 미루어 왔는데, 마침 雨堂 친구 溪史 李淳浩 교장께서 광주에 한번 다녀가라고 연락이 왔다.

雨堂, 內憲, 雲山12일간 광주, 나주, 장수군 문화유산 답사를 계획하고 8일 오전 830분에 문산 IC앞에서 만나 광주로 출발하였다.

11시경에 남해안 고속도로를 따라가다 창평IC에서 나와 광주국립 5.18묘지에 도착하였다.

 

1.국립 5.18묘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雨堂 친구인 溪史 李淳浩 교장이 나와 있어 반갑게 인사하고 묘지로 들어갔다.

 

먼저 민주의 문으로 입장하여 안내원에게 안내서를 받아들고 들어가니 어느 단체에서 추모 공연을 하고 있었다. 오늘 따라 날씨가 화창하다.

국립5.18 묘지묘역은 제일 앞에 향로를 중심으로 앞으로는 웅장한 추모횃불 탑이 높이 솟아있고 양 옆에는 추모비, 시민군조각상이 조성된 대광장이 있다. 추모탑 뒤편에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회생한 일천여명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우리들은 향로 앞에서 향()을 피우고 묵념을 한 후에 묘역으로 이동하였다.

옆에는 5.18묘지 준공기념비 헌시가 기록하고 있다.

해와 달이 빛나는

의혈의 고장 빛고을

여기

5월의 풀뿌리 꽃 넋들 누워

민주의 제단에 횃불로 타 오른다

불의를 무찔러 정의의 칼이 되고

고운 피 흘려 사랑의 꽃을 피운

그 이름 영원한 자유의 불사조

천추의 그 기상 무등을 겨루리라

만고에 그 업적 길이길이 푸르리라

, 찬란히 타오르는 5월의 불꽃이여

빛나는 영원한 민주의 깃발이여

5.18민중항쟁 추모탑으로 들어가니 묘역 안내판이 있다. 1묘역에는 782명 제2묘역에는 178분을 모실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이름을 찾을 수 있게 배치도가 그려져 있어 쉽게 자기 가족을 찾아갈 수 있다.

묘지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5.18 민주화 회생 자들의 명복을 빌면서 다시는 불행한 사건이 이 땅에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다짐한다.

점심시간이 되어 벽오동보리밥집에서 동동주와 함께 점심을 하였다. 다음 코스는

 

2.운천사 마애여래좌상(雲泉寺磨崖如來坐像) 유형문화재를 찾아갔다.

위치는 광주 서구 쌍촌동 99-7번지이다.

원효대사가 무등산 원효 사에 머물던 어느 날, 서쪽 하늘에 상서로운 기가 가득함을 보고 제자 보광화상을 그곳에 보냈더니 뜻밖에 큰 바위에서 빛이 솟아 나오므로 그곳에 이 불상을 새겼다고 한다. 자연 암벽을 다듬어 불상을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그 위에 건물을 지어 전각(殿閣)을 이루고 있는 일종의 석굴사원 형태로 고려시대 마애불양식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부처님께 삼배를 하고 조용한 법당을 나와 포충사로 이동하였다.

 

3.광주광역시 기념물 포충사 (褒忠祠)의 위치는 광주 남구 원산동 776번지이다.

이곳은 진주향교에서 몇 년 전에 답사한 곳이다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 · 종후(從厚,1554~1593) · 인후(因厚,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1554~1592) · 안영(安瑛,1564~1592)을 모신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 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전남지역 2대 서원 중 하나이다.

고경명 사당 앞에서 묵념을 하고 내려오니 포충사 옆에 특이한 자연석에 충노비(忠奴碑)를 새겨 두었다.

글을 읽어보니 봉이귀인은 고경명 선생의 家奴(집안 하인)로서 금산 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하여 고경명 선생과 차남 인후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 지내고 이듬해 다시 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 왜군과 싸우다가 주인과 함께 순절하였는데 국난을 당해 신원을 초월한 자기희생을 기리기 위해 자연석에 새긴 탑이다.

포충사를 뒤로하고

 

4.광주광역시 기념물 빙월당 (氷月堂: 月峯書院)으로 이동하였다.

위치는 광주 광산구 광곡길 133 (광산동)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기대승(15271572)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선생은 성리학의 대가로 새 학설을 제시하여 학계에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스승인 이황 선생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8년간의 서신왕래는 너무나 유명하다.

원래 이곳은 기대승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박상·박순·김장생·김집 등 조선의 명신들을 함께 배향하고 있는 월봉서원(月峯書院)’의 강당이었다.

월봉서원은 그가 죽은 뒤 그를 추모하기 위해 큰아들인 기효승이 선조 11(1578) 세운 것으로 정조가 빙월당이라 이름을 지어 내렸다.

앞면 7·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앞면과 오른쪽 반 칸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1980년 새로 세운 사당과 그의 저서를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 ·외삼문이 높다란 대지 위에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월봉서원을 뒤로하고

 

5.다시 나주시 전라남도 기념물 정열사비 (旌烈祠碑)로 이동하였다.

위치는 전남 나주시 대호동 642번지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천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김천일(15371593)은 이항 선생 아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22세 때 학문이 뛰어나 벼슬길에 오른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임진왜란 때 나주에 있다가 고경명, 박광옥, 최경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왜적이 남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자 적을 따라가 진주성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나 성이 함락당하여 아들 상건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은 지 34년 뒤인 인조 4(1626) 이곳 유림들이 김천일을 모시는 사당인 정열사(旌烈祠)에 이 비를 세웠다.

사당 앞에서 함께 묵념을 하고 나주 객사로 이동하였다.

 

6.보물인 나주 금성관 (羅州 錦城館) 위치는 전라남도 나주시 금성관길 8 이다.

조선시대 나주목 관찰부 동헌의 정문인 문화재자료 정수루(正綏樓)로 들어서면 나주 객사 건물인 금성관(錦城館)이 있다.

나주 금성관은 조선시대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행하던 객사 건물로서,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각종 기록과 구조양식으로 보아 전체적인 건축물의 규모와 골격은 1617년 중수시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고 추정되며, 목조 가구와 세부 공포형식은 1775년과 1885년 중수시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월대와 평면 및 입면 그리고 천장 등을 일반적인 객사와는 달리 궁전의 정전과 유사하게 구성한 점은 금성관 만의 고유성을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다. 금성관 정청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맞배지붕의 정청과 대비되는 희귀성을 갖는다.

그런데 이 거대하고 웅장한 객사건물이 보물인데도 문화재 보물이라는 표시판이 없어 이상히 여겼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나주시 문화관광과에서는 하루속히 문화재 표시판을 설치하기 주시기 바란다.

정수루(正綏樓)에서 서쪽으로 약 65m 떨어진 곳에

 

7.전라남도 문화재자료 나주목사내아 (羅州牧使內衙) 가 있다.

조선시대 나주 목에 파견된 지방 관리인 목사(牧使)의 살림집으로, 건물의 이름은 금학헌(琴鶴軒)’이다. 언제 지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대문 옆에 있는 문간채를 고종 29(1892)에 만든 것으로 보아 살림집 역시 19세기에 지은 건물로 여긴다.

일제 강점기 이후 군수의 살림집으로 사용하면서,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이다.

나주목사 내아는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객사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관아건축의 원래 모습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바로 옆에 4세대 째 경영하는 110년 된 나주곰탕(하얀 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다시 광주시 광산구 溪史 李淳浩 댁으로 이동하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중앙시장 풍년생선 횟집에서 넷이서 一杯 하고 돌아와 댁에서 하루의 피로로 깊이 잠이 들었다.

 

49 630분에 기상하여 이순호 교장께서 정성 드려 아침식사를 준비하여 먹고 오늘은 장성군 필암서원(筆巖書院)으로 이동하였다.

 

8.필암서원(筆巖書院)은 특이하게도 서원유물전시관이 있어 들어가니 문화유산 해설사 게서 친절히 안내해준다.

서원유물전시관을 답사하고 필암서원으로 이동하였다

필암서원은 조선의 대학자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선생의 학덕과 정신을 추모하기위해 1590년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고 167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1662년 현종 임금 때 筆巖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인 서원 배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서원이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사우 훼철 때도 헐리지 않는 호남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2019710일 필암서원을 포함한 9개 서원이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국가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전국 9개서원은 다음과 같다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이다.

 

확연루(廓然樓)를 들어가면 경장각(敬藏閣)이 있다.

경장각은 조선 12대 인종이 내린 묵죽도와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다. 정조10(1786)에 건립되었으며 현판 글씨는 정조가 손수 썼다고 알려져 있다. 임금이 쓴 글씨는 존엄하고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얇은 천으로 가렸다, 글씨체는 초서이다.

필암서원을 답사하고 어제 국립 5.18 민주 묘지주차장에 雨堂 차가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여기서 溪史 李淳浩 교장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들은 어제 왔던 고속도로로 해서 승주IC로 나와 선암사로 가는 길옆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하였다.

 

이번 답사는 溪史 李淳浩교장의 친절한 안내와 이동 및 침식을 하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그리고 雨堂 이충련 교장께서 광주까지 먼 거리를 왕복 차량 운행으로 수고 하셨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12일 동안 8곳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어제를 담아 내일에 전하는책임감을 더욱 간직하는 정신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