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고려 현종 부자 상봉길 답사

雲山- 2020. 3. 19. 16:17

‘20.3.18. 고려 현종 부자 상봉길을 따라

 의암(毅庵:朴亨濟)께서 아침10시경 연락이 왔다. 점심식사를 경상대학교 병원 앞 전주 콩나물 국밥을 먹자고 하면서 준당(準堂:柳辰熙)과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러면 식사 후 사천시에서 새로 조성한 「고려 현종 부자 상봉길」을 답사하자고 제안을 하였더니 두 분은 아직 가보지 않았기에 내가 안내를  하였다.
11시30분에 식사를 하고 2017년 12월17일에  오봉 회에서 답사하였던 길로 안내하였다.
3년이 지나다보니 가는 길을 확실히 몰라 T-map으로 일단 사남면 구룡못을 입력하고 가다보니 구룡못 끝부분에서 왼편으로 안내판이 있다.
능하마을은 아버지 왕욱이 귀양살이를 하였던 곳이자 욱이 묻힌 산봉우리이다. 욱의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복시이장(伏屍而葬)하거라” 하고 말하였다. 풍수의 지리에 능했던 욱은 묏자리가 풍수적으로 임금이 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현종이 아버지 왕욱의 장지가 있는 봉을 능하 봉이라 하고 그 아랫마을을 능화 촌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능이 있는 아래 마을이고 꽃밭등이 있는 마을 이라는 의미이다.
마을 끝에서 작은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를 돌아 조금 올라가니 안종 능지로 가는 표지석이 있다.


























   
고려 태조의 여덟째아들인 욱(郁)이 사수현(현재사천시)으로 유배(流配)되어 성종(成宗)15년 996년 7월에 죽은 후 유언에 따라 이곳에 복시이장(伏屍而葬:시신을 엎어서 장사 지내면 10년 안에 그의 자손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하면 즉멸(卽滅)10년 하였다가 뒤에 그의 아들 순(詢)이 1009년에 현종으로 등극하자 아버지 욱은 안종(安宗)으로 추존하여 송도(松都)로 이장하고 건릉(乾陵)이라 하였고 1986년 사천 문화원에서 릉지(陵止)에 표석을 세우고 보존하여 왔다.
역사 속에 묻혀 잊혀진 옛길의 흔적을 2009년도에 릉(陵)으로 가는 길을 복원하였다. 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고려 안종 추모제단(高麗安宗追慕祭壇)」이 마련되어 있다. 그 주변은 편백 숲으로 울창하게 욱어져 등산로가 있어 많은 등산인 이 산행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다시 차로 400여m오르니 고개 마루에  고자정(顧子亭)이 있다. 이곳 고자봉은 아버지 왕욱이 눈물을 흘리던 지금의 정동면 학촌리 고개를 고자봉(顧子峰-아들을 되돌아본다)이라하고 이 마을을 고자 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2015년 사천시에서는 아버지 욱이 아들 순이 있는 배방사(排房寺)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곳에 『고자정(顧子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오늘날 고자 실이 학촌이라 불리게 된 계기는 1914년 행정구역 병합 때부터이며, 마을 앞에 솟은 산이 학의 형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자봉 안부에 차를 세워두고 고자 정에 올라 고자정이라 글이 새겨져 있다. 다시 이곳에서 사천시 사천읍 고읍으로 가는 이구산 등산로를 새로 만들었다. 처음 오르는 계단만 지나면 평평한 육산이다. 몇 봉우리를 오르고 내려다가 더 이상 갈 수 없어 다시 돌아서 고자봉 고자 정으로 왔다.
고자 정에서 학촌으로 내려 갈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생각 외로 임산도로가 넓지는 않지만 차가 갈 수 있어 다행으로 고자 실 마을을 지나 다시 아들 순이 2살부터 6살까지 있었던 배방사를 찾아 갔다.
마침 가다보니 곳곳마다 안내판을 만들어져 있어 찾아 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학촌 마을을 지나 진주-고성간 국도를 건너서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 뒤 천금산(千金山) 맞은편 산자락에 있다. 대산 벽화마을에 들어서니 마을 입구부터 담장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아 이 마을이 배방사로 가는 마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3년 전에 갔을 때를 생각하면서 가다보니 왼편 길을 가야하는데 오른쪽으로 계속 올라가니 이 길은 임도 이므로 다시 마을 까지 내려와 마을 회관 앞 왼편으로 가니 옛날 다녀왔던 길이 나타난다. 마을을 지나는 도중에 담벼락위에 그려진 벽화를 보니 현종(顯宗)이 어릴 때 아버지 욱을 만나는 모습, 이후에 왕이 된 벽화와 현종이 어릴 때 지은 시(蛇兒詩)도 쓰여 있다. 굽이굽이 돌아 올라서니  천금산 배방사 노곡당이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이 작은 사찰은 그 당시 사찰이 아니고 근래에 세운 개인절이다. 노곡당이라는 이름은 신라시대부터 있던 사찰이며 배방 사는 노곡당이 없어지고 다시 배방사라 하였다.


의암과 나는  들어가 참배를 하고 나와 보니 준당은 벌써 앞서 가고 있다. 옛 배방 사는 아직 더 올라가야 하는 표시판이 있다. 300m를 더 올라가니 배방사지 안내판과 배방사지(排房寺止) 표지석이 서있다.
위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가운데가 오목하게 생겼는데 속칭“배방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방사 가 옛날부터 이름나게 된 까닭은, 고려 초기에 현종이 어린 시절 한 때를 이 절에서 보낸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 동국여지승람》(1530년)을 비롯하여 여러 향지(鄕지) 배방사조(排房寺條)를 보면 현종에 관한 고사가 어김없이 실려 있다.
다시 돌아 나오면서 대산마을 벽화를 보니 고려 현종이 어린 시절 (5~6세) 이곳, 배방 사에서 지었다는 사아시(蛇兒詩)가 적혀 있다.

     

『小小蛇兒遶藥欄(소소사아요약란)
작디작은 꽃뱀 새끼가 난간에 올랐구나.
滿身紅錦自斑斕(만신홍금자반란)
온몸은 비단 같고 반점은 아름답네.
莫言長在花林下(막언장재화림하)
이 작은 꽃뱀도 숲에만 살 것이라 말하지 말라
一日成龍也不難(일일성룡야불난)
때가 오면 하루에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를 것을』


    
 고려 제8대 현종(1009~1031)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 묘호는 현종이다. 태조의 아들 안종(安宗) 욱(郁)과 헌정왕후 황보 씨의 아들이다. 고려 제5대 경종이 승하하자 그의 아내인 헌정왕후는 궐 밖에 나가 살았다. 그러다 왕의 삼촌인 경주원군(왕욱)과의 사이에서 임신을 하게 된다. 당시 철저한 유교 주의의 임금인 성종의 귀에 들어가 경주원군은 유배를 가게 되고 어머니 인 헌정왕후는 그 충격으로 자신의집 밖 버드나무 아래서 아이를 낳고 얼마 후 생을 마감한다. 고아나 마찬가지였던 왕순(훗날 현종)은 보모에게 맡겨져 키워졌다. 어느 날 성종의 명으로 궁에 들어와 대면하게 되는데 왕순 이 성종의 무릎위로 기어 올라가 “아비. 아비”라고 하며 아버지를 찾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겨 아버지 왕욱이 있는 사천 땅으로 보내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살지는 못하도록 하여 이곳 정동면 대산마을의 배방 사에서 거주하게 되고 왕욱이 사망하는 996년까지 이곳 배방사에서 4년을 살다가 이듬해 997년 6살 되던 해 개성(숭교사)으로 돌아 왔다.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대량원군(훗날 현종)을 숭교사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다. 이후 자객들이 자주 들이 닥치자 목종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 신혈사(현재 서울 진관사)로 갔다가 마침내 1009년 강조의 난에 의해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이 된다.
그 후 현종은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십훈요』등을 통해서 제시했던 국가의 기본방향이 성종 대에 일 단계 정비 되고 현종 대에 기틀을 다지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을 제작하였으며 6천여 권의 대장경은 현종 때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오늘 우리가 이웃 진주시에 살면서 이러한 기막힌 부자 상봉길이 있음을 늦게나마 알게 되어 오늘 천 년 전의 역사를 더듬어 고려시대 역사를 살펴보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되어 기록을 남긴다.